세비야의 봄은 눈보다 코로 먼저 온다.
“향이 먼저 다가온다. 세비야의 봄은 눈보다 코로 먼저 온다.”
세비야에 처음 온 사람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 왜 이렇게 오렌지 나무가 많지?”
보도 옆, 광장 한가운데, 심지어 교회 담장 아래까지.
나무마다 둥글고 선명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걸 따먹지 않는다.
왜일까?
세비야의 오렌지는 우리가 아는 달콤한 과일이 아니다.
쓴맛이 나는, ‘나랑호 아마르고(Naranjo Amargo)’.
발음도 낯설고, 맛도 낯설다.
하지만 이 나무는 먹기 위해 심어진 게 아니다.
향기와 계절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나무다.
봄, 향이 먼저 다가오는 계절
“향이 먼저 다가온다. 세비야의 봄은 눈보다 코로 먼저 온다.”
3월이면 도시 곳곳에 작은 하얀 꽃이 피어난다.
현지 사람들은 그것을 ‘아사하르(Azahar)’, 오렌지꽃이라 부른다.
결혼, 정결, 기억의 상징이라는 이 꽃은
골목마다 은은한 시트러스 향을 퍼뜨린다.
그 향은 눈보다 먼저 계절을 알려준다.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다가와
걸음을 멈추게 하고, 고개를 들게 만든다.
처음 그 향을 맡았을 땐,
“이게 꽃향이지? 아니, 나무 향인가?”
그러다 문득—
“이 향,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어.”
아카시아꽃.
초여름의 골목길,
작고 하얀 꽃이 나뭇가지에 잔뜩 매달려
온 동네를 달콤하게 물들이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세비야의 오렌지꽃은 그리움처럼 피어난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인데도,
향기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준다.
겨울, 도시가 주황빛으로 익는 시간
“겨울이 오면, 거리는 주황빛으로 익는다.”
시간이 흐르면,
꽃은 지고, 나무마다 주황빛 열매가 맺힌다.
겨울이 오면, 거리는 주황빛으로 익는다.
12월에서 1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과일처럼 익어간다.
햇살이 부드럽게 퍼지는 오후,
세비야의 골목은 마치 그림엽서 같다.
그리고 그 즈음, 도로엔 안내문이 붙는다.
“No aparcar – recogida de naranjas”
(주차 금지 – 오렌지 수확 중입니다)
수확, 도시가 흔들리는 하루
“나무가 흔들리고, 도시도 함께 흔들린다.”
세비야는 매년 겨울이 되면
도시 전역의 쓴 오렌지를 한꺼번에 수확한다.
트럭이 들어오고, 기계가 나무를 흔들고,
우수수 떨어지는 열매들이 바닥을 두드린다.
그건 하나의 노동이자, 풍경이고,
이 도시만의 리듬이다.
수확된 열매들은 어디로 갈까?
• 일부는 영국으로 보내져 전통 마멀레이드가 되고
• 일부는 향수, 리큐어, 에센셜 오일로 재탄생하며
• 나머지는 퇴비나 바이오가스—도시의 에너지로 다시 태어난다.
이 도시는 과일조차 버리지 않고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조용한 오후의 골목에서
“이 골목에서, 계절은 기억이 된다.”
늦은 오후,
햇살이 한쪽으로 기울고,
그림자 사이로 오렌지 나무가 조용히 흔들린다.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이 나무들은 말하지 않지만,
향과 계절, 바람과 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계절을 살고, 생각을 머물게 한다.
나는 그 짙은 향기를 기억하며, 아스팔트 위가 녹아내릴 듯한 오늘의 태양 아래서, 오렌지 빛 도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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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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