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서 그리움은 밥처럼 찾아온다

중고밥솥이 나를 울린 오늘

by luna Han 윤영

밥솥이 도착한 날, 나는 생각보다 설레었다.

고작 밥 한 번 지으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이어서일까.


나는, 내가 먹기 위해 식당을 한다.

그리고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내 밥’을 지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 살게 될 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여행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약속이 없으면 집에 틀어박혀 뒹굴뒹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즐겼다.

그래서 여권도 마흔이 넘어서야 처음 만들었다.


보통은 해외에 오면 현지 음식을 즐기라지만,

나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잘 못 먹는 사람이다.

혼자 있을 땐 더하다. 밥도 대충, 배만 채우는 식으로 넘긴다.

그런 내가 세비야에서 한식당을 하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끼는 동생이 세비야에서 가이드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자주 묻는단다.

“한식당 추천해 주세요.”

그러면 그 동생은 우리 식당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 누나는요, 본인이 먹으려고 식당을 해요.”


정말 그 말 그대로다.

휴무일이면 나와 남편은 각자 자기가 먹을 요리를 한다.

나는 내가 먹을 한식을,

그는 그가 먹을 스페인 요리를 만든다.

가끔은 내가 그의 감바스를 한입 먹고,

가끔은 그가 내 김치찌개를 조심스럽게 떠먹는다.

서로의 입맛을 존중하며, 그렇게 밥을 짓고,

함께 각자의 요리를 먹는다.


세비야에는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한인마트가 없다.

도심에 작은 중국 마트 하나, 외곽에 조금 큰 중국 마트 하나가 있을 뿐이다.

6년 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여전히 구할 수 없는 재료도 많고,

무엇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한국 유학생들이 귀국할 무렵이면

중고 거래 게시판을 눈여겨보게 된다.

며칠 전, 거기서 정말 귀한 물건을 발견했다.

쿠첸 3인용 밥솥.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메시지를 보냈고, 6년 만에 득템을 했다.


오늘, 그 밥솥으로 처음 밥을 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늘 바쁘게 살아왔다.

그 흔하다는 향수병도, 나에겐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뜨거운 김 사이로, 흰 밥 사이사이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엄마는 늘 아침밥을 챙겨주셨다.

학교에 늦더라도 밥은 꼭 먹고 가야 한다며

고봉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셨다.

억지로 꾸역꾸역 넘기던 그 밥이

지금은 이토록 그립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여기 세비야에서는

감사의 마음으로,

그리고 그리운 추억으로 돌아온다.


한 숟갈마다 엄마가 그리워졌고,

먹는 내내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그리움은 밥처럼, 매일 찾아온다.

포만감과 배고픔이 오가듯이,

사랑도 그리움도

그렇게 내 안을 들락날락한다.


밥상 앞, 아무도 울지 않을 것 같은 이 순간,

가장 깊은 그리움이 찾아온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 연재 안내

이 에세이는 실명으로 연재되는 회복의 기록입니다.

Luna Han 윤영의 연재 일정

《이혼해도 괜찮아》 :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끝난 결혼,

이제는 나를 위해 입을 여는 이야기.

《루나의 세비야》 : 매주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도시,

세비야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진실, 유죄》 : 매주 목요일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죄가 되는 시대.

그럼에도, 말해야만 회복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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