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걸 집으려면, 지금 쥔 걸 놓아야 하니까

함께 앉아, 다음을 그리는 중.

by luna Han 윤영

2025년, 이 계절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세비야의 햇살 아래,

나는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무언가를

처음으로, 정말로 놓아보기로 했다.


식당을 매각하기로 마음먹은 건 몇 달 전이다.

지쳐서가 아니라,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고갈되기 전에 스스로를 정리하고 싶었다.

붙잡는 것도 용기지만,

놓는 건 더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하게 된 순간이었다.

세비야 센트로,

이곳에서 나는 6년 넘게 한식당을 운영해왔다.

요식업 경험도 없이,

그저 집밥 하나는 자신 있었던 내가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과는 너무 달랐다.

재료 하나 구하는 것도,

현지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도,

무엇보다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내가

가장 큰 벽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문을 열었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오롯이 ‘맛있는 음식’ 한 접시에 집중했다.


그 결과,

코로나 시기를 지나

세비야에서 가장 평점 높은 한식당이 되었고,

현지인과 여행자들에게

따뜻한 한 끼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동산 매매 사이트,

idealista에 매물을 올렸을 때만 해도

그저 ‘결정했으니 해보자’는 마음뿐이었다.


며칠 후,

첫 구매 희망자와의 미팅이 있었다.

협상은 끝내 불발로 끝났지만,

그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지하게 인수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힘들어 남편을 붙잡고 울던 밤,

홀에 혼자 남아 불을 끄던 새벽,

웃으며 “맛있었어요” 하고 나가던 손님들,

이제는 친구가 된 사람들.


그 모든 날들이

그 한순간에 쏟아졌다.

요즘은 손님들의 인사가 다르게 들린다.


“여기 덕분에 한식 고팠는데, 다음 여행도 든든해요”

“이곳 없으면 세비야가 허전할 거예요.”

“대박 나세요, 꼭이요.”


웃으며 인사를 받지만,

그 말들이

조용히 마음을 건드리고 간다.


아직 매각은 확정되지 않았다.

운영은 계속되고 있고,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음식을 만든다.

함께 일하는 직원도 묻는다.

“정말 그만두시는 거예요?”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그러면서도

어학원 이야기가 나오면 제일 먼저 아이디어를 낸다.


“수업은 이렇게 해보면 어때요?”

“공간은 이렇게 꾸며도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어학원을 준비하고 있다.

스페인어와 한국어.

두 언어가 만나는 곳.

그 사이를 문화가 잇는 공간.


그걸 만들기 위해

3년 전부터

조용히, 천천히 준비해왔다.


식당이 한산한 오후,

홀 구석에서 스페인어 교재를 펼쳤다.

마감 후 혼자 남은 밤,

의자에 앉아 강의안을 썼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도

나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알아차렸다.

진짜 시작은,

놓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것을.


다른 걸 집으려면,

지금 손에 쥔 걸 먼저 놓아야 하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무엇을 정리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식당은 내 고집이 만든 집이었다.

버티는 법도,

웃는 법도,

다 이 공간에서 배웠다.


그 고집을 품고,

이젠 다르게 살아보려 한다.


조금은 덜 지치고,

그래도 진심은 그대로이길 바라며.


윤영, 홧팅.

Luna Han, ¡Ánimo!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 연재 안내

이 에세이는 실명으로 연재되는 회복의 기록입니다.

Luna Han 윤영의 연재 일정

《이혼해도 괜찮아》 :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끝난 결혼,

이제는 나를 위해 입을 여는 이야기.

《루나의 세비야》 : 매주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도시,

세비야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진실, 유죄》 : 매주 목요일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죄가 되는 시대.

그럼에도, 말해야만 회복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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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