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서는 아프면 안 된다

by luna Han 윤영

물론입니다. 요청하신 모든 수정 사항을 반영한

《루나의 세비야》

〈세비야에서는 아프면 안 된다〉 최종 확정 리라이팅 원고를 아래에 정리해드립니다.



《루나의 세비야》


세비야에서는 아프면 안 된다


나는 파인애플 알러지가 있다.

모르고 먹으면 목소리가 사라지고,

얼굴과 목이 붓기 시작하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 없이 지냈지만,

이 알러지로 한국에서도 몇 번이나 앰뷸런스를 타고,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낯선 요리를 먹을 땐,

소스에 파인애플이 들어가는지 꼭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1. 경계했지만, 피하지 못한 고통


3년 전, 친한 한인 부부와 우리 부부가 세비야의 중국식당에 갔다.

주문할 때도 익숙하게 소스를 확인했고, 별문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식당 문을 닫고, 3일을 집에서 버티다 결국 탈진 증상이 찾아왔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급하게 스페인의 응급 전화 112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911을 눌렀지만, 스페인에서는 911도 자동으로 112에 연결된다.)



2. 택시보다 느린 구급차,


침대째 대기하는 응급실


앰뷸런스는 정확히 47분 만에 도착했다.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신호 하나 어기지 않고 천천히 달리는 구급차는

그저 누워서 타는 택시처럼 느껴졌다.


세비야에서 처음으로 응급실에 환자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병원 침대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서 환자들은 그냥 누워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목에 이름이 적힌 파란 팔찌를 채우고 침대째 대기.

2시간쯤 지나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간단한 증상만 물었다.

그리고 간호사가 와서 피를 뽑았다.

“결과를 기다리세요.”

또 2시간.


결국 받은 처방은

파라세타몰(Paracetamol).

스페인에서 가장 흔하고도 유명한 진통·해열제였다.



3. 스페인의 병원 시스템, 정말 ‘무료’일까?


스페인의 공공의료는 사실상 무상이다.

외국인도 NIE(외국인 등록번호)와 주소 등록만 하면

보건소에서 **‘타르헤타 사니타리아(Tarjeta Sanitaria)’**라는 건강카드를 발급받고,

진료, 검사, 응급실, 입원까지 대부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무료’라는 말 뒤에는 긴 대기와 불친절이 숨어 있다.

진료는 예약제로 운영되고, 의사를 만나기까지 몇 주씩 기다리는 일도 흔하다.

응급실에서도,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증상이라면 침대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게 기본이다.


의사는 영어를 거의 하지 않고,

처방은 대체로 간단하다.

첫 번째 약은 거의 언제나 파라세타몰.


한마디로,

느리고 간단하지만, 공정하고 무료인 시스템.

그러나 아픈 사람 입장에선 너무 느리고, 지나치게 단순하다.



4. 무력함 이후의 결론


나는 결국

한인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한국에서 장염약을 가져온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편이 약을 받아 왔고,

그 약을 한 봉지 먹자마자,

몸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생각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한국 약만 드는 걸까?

아니면, 이 의료 시스템에 진짜 문제가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문제는 약이 아니었다.

그 약이 필요한 순간,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그건 결국 진료의 속도와 전달력의 문제였다.



5. 그래서 나는,


세비야에서는 아프면 안 된다.

아프다는 건 이 도시에서 가장 외롭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멈춰 서고,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절대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선 병이 나기 전에 알아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건강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이 도시와 평화롭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나도,

내 건강을 먼저 걱정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번에 한국에 가면,

익숙한 그 시스템 안에서 건강검진부터 꼭 받아야겠다.

아플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되,

아프지 않도록 먼저 준비하는 것.


지금의 나를 지키는 가장 조용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 연재 안내

이 에세이는 실명으로 연재되는 회복의 기록입니다.

Luna Han 윤영의 연재 일정

《이혼해도 괜찮아》 : 매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끝난 결혼,

이제는 나를 위해 입을 여는 이야기.

《루나의 세비야》 : 매주 화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 도시,

세비야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담았습니다.

《진실, 유죄》 : 매주 목요일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죄가 되는 시대.

그럼에도, 말해야만 회복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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