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기 때문에 벗는 것 - 누구도 눈치 보지 않는 세비야

나는 이제 한 겹씩, 마음부터 벗어간다.

by luna Han 윤영

주말의 외출이 얼마 만이었을까.

우리 부부, 가족처럼 지내는 한국인 부부,

그리고 곧 결혼을 앞둔 스페인 여성과 한국인 남성 커플.

총 세 커플이 함께 세비야 외곽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 부부가 친구들을 픽업했고,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레스토랑 입구 그늘 아래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햇살은 기울었고, 바닥과 벽에서 되받은 열기가 여전히 피어올랐다.


나는 웃으며 원피스를 가볍게 털었다.

아주 얇은 끈 나시 위에 길게 흐르는 린넨 원피스를 입었고,

그 위에 다시 반팔 셔츠를 걸쳤다.


나름대로 시원하게 입은 옷이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내 모습은,

오히려 더 답답해 보였다.


얇은 끈 나시 위에 다시 셔츠를 걸친 사람.

한 겹을 벗고도, 또 한 겹을 두른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나 이번에 여름 세일할 때 자라에서 이거 샀다?”

스페인 여성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털어 보였다.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 없는 얇은 민소매 티셔츠, 짧은 린넨 팬츠.

그 모습은 전혀 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날의 날씨에 가장 솔직한 복장이었다.


스페인의 공식 세일 시즌은 여름(7~8월)과 겨울(1월 한 달).

하지만 대부분의 브랜드는 6월 말부터 이미 할인에 들어간다.

올해도 Zara는 앱에서 6월 25일부터 세일을 시작했고,

매장은 그 다음 날 문을 열었다.


거리에는 rebajas(세일) 간판이 일제히 걸렸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더 얇고, 더 짧은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처음엔 ‘rebajas’가 단지 세일을 뜻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여기선, 그 단어 하나로 계절도 바뀌고, 거리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여름 rebajas가 시작되면,

이 도시는 본격적으로 ‘덜 입기’에 들어간다.


셔츠는 벗고 반바지만 입은 남성들,

끈 나시에 질끈 묶은 머리,

아이들은 샌들과 속옷 한 장만 걸치고 거리를 뛰었다.


나는 부러움 섞인 진심으로 말했다.

“나도 이렇게 입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부터 몸에 밴 습관이 쉽게 안 없어지더라고.

그래서 결국, 셔츠를 하나 더 입고 말았어.”


친구들은 웃으며 말했다.


“누나, 여긴 그냥, 더우면 덜 입는 거야. 끝.”


그 짧은 말에,

내가 아직도 옷보다 시선을 먼저 입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 세비야에 왔을 땐 모든 게 달라 보였다.

너무 짧은 반바지, 너무 깊게 파인 브이넥,

심지어는 브래지어조차 하지 않은 채 장을 보는 엄마의 옷차림까지.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덥긴 하지만, 저건 좀 과한 거 아니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들의 옷이 아니라,

내 안의 시선을 먼저 검열하고 있었다는 것.

그 시선은 타인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나 자신에게 더 엄격했다.



여기 사람들은 시선보다 온도를 먼저 생각한다.

체형이 어떻든, 나이가 몇이든,

덥다면 덜 입는 게 당연하고,

편한 옷차림은 그저 여름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며 셔츠 소매를 걷던 나에게

지나가던 노부인이 말했다.

“¿Por qué no te lo quitas?”

그거 벗지 그래?


그 말은 짧았지만,

그 순간 나는 한 도시가 나에게 건네는 인사를 들은 것 같았다.

여기서는 더운 날 옷을 벗는 것이

누군가를 자극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당연한 생존의 언어라는 걸.



나는 아직도 나시 한 장을 망설인다.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을 상상하고,

결국 셔츠를 하나 더 챙기게 된다.


아직 나시 한 장이 낯설지만,

다음엔 셔츠를 두고 나가볼 생각이다.


세비야의 여름은

옷보다 먼저, 마음을 해방시킨다.


이 도시는 그렇게, 내 안의 굳은 시선을 하나씩 녹여낸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말을 기억한다.


“누나, 여긴 그냥, 더우면 덜 입는 거야. 끝.”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 분들 덕분에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재 중인 시리즈


<< 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 - (월·수·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기록입니다.


<< 루나의 세비야 >> - (화·토·일)

좌충우돌 이방인의 삶,

사랑, 회복, 그리고 자립의 기록.


<< 진실, 유죄 >> - (목)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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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Han윤영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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