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선 ‘늦어서 미안‘이란 말이 없는 걸까?

시간 좀 지켜줄래?

by luna Han 윤영

오늘도 출근 시간 10분이 지난 뒤, 문이 열렸다.

직원은 말없이 들어섰고,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인사는 없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흔한 한마디 없이, 그는 유니폼을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지각이 문제 되지 않는다.

버스를 놓쳐 늦는다는 메시지가 단톡방에 올라오는 날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예 아무 말 없이 15분, 30분 늦는 일도 많다.

늦었다고 뛰어오는 기색도 없고, 사과는 더더욱 없다.


나는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근무 시간은 지켜야 하고,

혹시 늦게 될 상황이면 단톡방에 사유와 도착 예정 시간을 남기라고.

하지만 그 말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예약 시간보다 늦는 건 흔한 일이고,

예고 없이 도착하는 경우도 잦다.


한 번은 워홀로 우리 식당에서 일하던 한국인 직원 K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한식을 먹겠다며 점심 예약을 했다.

그날 K는 예약 시간보다 미리 도착해 혼자 자리에 앉아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은 오후 2시였다.

2시 반이 훌쩍 넘었지만, 홀에는 K 혼자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왜 아직도 안 오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 사람들,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약속 시간에 루즈한 경우 많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편하게 기다려.”


그 말을 하며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몇 년 전의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만 같았다.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상대의 무심함에 내가 민망해지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이해보다 당황이 먼저였고

기다림은 외로움과 싸우는 일이었다.


남편과 약속이 있는 날이면 지금도 몇 번씩 당부하게 된다.

시간 꼭 맞춰야 한다고, 늦지 말자고.


나는 원래 약속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잠시 혼자 여유를 갖는 시간이 편했던 사람이다.

예정된 시간보다 미리 준비하고,

상대보다 먼저 도착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세비야에 와서는

그 ‘시간을 지킨다’는 행동 자체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루는 우리가 함께 저녁 약속을 한 날이었다.

나는 벌써 신발까지 신고 문 앞에 서 있었고,

남편은 아직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지금 나가야 돼.”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살 때도 그랬다.

남편과 함께 약속 장소로 향할 때면

나는 늘 초조했고,

시간이 촉박해질수록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단순한 생활 습관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다른 세계에서 온 두 사람이 부딪히는 장면이라는 걸.


한국에서는 단 1분만 늦어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와야 했다.

지각은 예의에 어긋났고,

신뢰에 금이 가는 일이었고,

하루의 기분을 망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나라에서 자랐다.

늘 상대보다 먼저 도착해야 안심이 되었고,

시간을 지킨다는 건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30분 늦게 나타난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앉을 때면

나는 아직도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이해하지 못한 걸, 억지로 삼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뱉어낼 수도 없다.

이 느슨함은 아직도, 내겐 삼키지 못하는 숨이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연재 중인 시리즈


<<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께 >> (월·수·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기록입니다.


<< 루나의 세비야 >> (화·토·일)

좌충우돌 이방인의 삶, 사랑, 회복, 그리고 자립의 기록.


<< 진실, 유죄 >> (목)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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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Han윤영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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