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의 아침은 ‘식사’가 아니라 ‘여유를 갖는 시간’

여름을 마시는 세비야

by luna Han 윤영

세비야에서 아침은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다.

한 잔의 커피, 한 조각의 빵,

그리고 옆 사람의 안부 한마디가

하루를 시작하게 만든다.


이곳의 아침은 식사가 아니라,

여유를 갖는 시간이다.


김치가 없으면 입맛이 뚝 떨어지는 나.

반면, 아침엔 커피와 빵으로 시작해야 하는 남편.

그래서 아침은 내가 양보했다.


우린 집에서 내린 진한 커피와,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세비야식 흰빵, 모예떼(Mollete) 위에

잘 익은 토마토를 반으로 갈라 문지르듯 바른다.

가볍게 소금을 뿌리면, 이곳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전형적인 데사유노(Desayuno),

아침 식사가 완성된다.

이 도시답게 갓 짠 생오렌지주스도 빠지지 않는다.


아침의 온도는 커피보다 느리게 데워지고,

빵 위의 올리브유처럼 천천히 하루가 스며든다.


가끔 단골 바에 가서 같은 조합으로 아침을 먹을 때면,

그곳은 그저 ‘바’가 아니라 동네 사랑방처럼 느껴진다.


이웃들의 인사는 기본이고,

그날의 동네 소식이며, 서로의 안부까지 자연스레 오간다.

아무 말 없이도 익숙한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보면,

그 바엔 아침부터 맥주 한 잔, 위스키 한 잔을 ‘빠르게’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세비야 사람들은 낮에도 당당하게 잔을 든다.


대체로 술은 빠르게, 짧게 마신다.

바에 맥주값만큼의 동전을 내려놓고,

또다시 빠르게 사라진다.


이들은 맥주를 잔 가득 따르지 않는다.

작은 유리잔에 담긴 까냐(caña) 한 잔,

혹은 조금 더 큰 잔에 반쯤만 따른다.

김 빠진 맥주, 데워진 맥주는

미련 없이 남기고 버리는 것.

그게 이곳 사람들이다.


나도, 지나간 김 빠진 내 삶과 상처를

그들처럼 담담하게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짧은 한 잔은, 어쩌면

이 도시 사람들의 인생 철학일지도 모른다.


맥주를 물처럼 마시는 세비야 사람들은

더운 여름엔 물보다 맥주가 갈증 해소에 더 좋다고 말한다.

어쩌면 핑계일지 모르지만,

그 말에는 이 도시의 계절과 기분이 담겨 있다.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

말 그대로 ‘여름의 와인’.

이름부터 계절이 느껴지는 이 음료는,

세비야의 햇살과 바람을 함께 마시는 것 같다.


레드 와인에 레몬 탄산수나 오렌지 소다를 섞고,

얼음을 가득 띄운 그 시원한 잔은

이곳 여름을 가장 세비야답게 마시는 방법이다.


이 한 잔이,

세비야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선명한 맛이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도시의 바가 좋다.


서로의 잔 사이로,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이웃들의 얼굴에서

나도 괜찮은 시간을 보내 온 듯한,

작은 경쾌함을 느낀다.


이렇게,

내 상처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청명한 띤또 데 베라노 한 모금에

조금씩 녹아가고 있다.




오늘도 제 글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연재 중인 시리즈


<<엄마, 이제 내가 엄마할게>> - (월·수·금)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끝까지 기억하려는 딸의 기록입니다.


<<루나의 세비야 >> - (화·토·일)

좌충우돌 이방인의 삶, 사랑, 회복, 그리고 자립의 기록.


<< 진실, 유죄>> - (목)

사라진 진실에 대해, 이제는 말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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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Han윤영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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