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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각달

수신자불명

오늘의 당신에게 오늘의 나로부터

by 디어





오늘 타이페이는 하루 종일 비가 와요. 더위가 가시고 우기가 오면서 내내 비가 오는 게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오늘은 하루 종일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유난스럽게 느껴지네요. 매일 오락가락하던 일기예보조차도 온종일 강수 확률 100%를 가리키고 있어요. 비 오는 날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에 아른아른 잠드는 걸 좋아하는데 답지 않게 이어폰 사이로 파고드는 소리가 반갑지만은 않은 날이에요.


서울은 꽤 추웠나 봐요. 따뜻한 실내에 앉아 서울의 사람들을 구경할 수는 없지만 코트 자락을 여민 채 바삐 걸어가는 사진을 봤어요. 11월 22일의 대만과 한국은 많이 다르네요. 참 이상하죠. 비행기로 두 시간 반이면 닿을 거리라고 생각하면 학교를 통학하는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가깝게 느껴지는데 거리로 1500km라고 이야기하면 갑자기 아득하니 멀어지는 것 같아요. 부쩍 다르게 느껴지는 날씨는 그 거리만큼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려나요. 더위에 너무 적응해버린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꽁꽁 얼어버리진 않을까 실없는 걱정을 해요. 알다시피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잖아요.


스웨터에 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도 춥다고 느낄 때면 대만이 몹시 그리워지지 않을까요. 언제쯤이면 여기서도 그런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고 얘기하던 시간들도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때면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웃으며 훌쩍 대만에 찾아올 여유가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단골 펍의 바 자리에 앉아 사장님과 이제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고 그런 소소한 대화를 나눌래요. 마치 내가 한 번도 대만을 떠난 적 없는 것처럼, 어제도 대만에 있었던 것처럼 일상적인 대화를요.




오후 세 시의 타이페이


타이페이 집의 창문에서만 쏟아져내려 오는 햇살이 있어요. 서울 집의 창문도 커다래서 아침이면 늦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밝아지곤 하지만 타이페이의 햇살과는 그 결이 달라요.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글쎄요, 좀 더 여유롭고 나른해지는 주황빛이라고 할까요. 암막 커튼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햇빛이 항상 참 예뻐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게 돼요. 신베이 시에 살 때는 오후 한 시에도 새벽 어스름처럼 어두웠는데 이사 온 다안구의 집은 환하게 햇살이 들어차요. 이래서 사람이 사는데 일조량이 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하나 봐요. 어제 만난 친구는 원래 창문 없는 집에 살다가 답답함에 못 견뎌 결국 이사했는데 월세가 4만원 정도 비싸졌대요. 햇빛 값이라고 둘이 맞장구쳤어요.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땐 모든 게 어설펐는데 이렇게 자취인이 되어가나 봐요.


한국에서 알게 되어 어떻게 이렇게 대만에서 다시 만났냐며 좋아하던 친구는 어제 벌써 돌아갈 날이 다가오냐고 놀라고 아쉬워했어요. 그동안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단 말도 함께요. 살던 곳을 떠나온 타지에서 처음 맞아주고 반겨주고 좋은 곳도 데려가 줬는데, 오히려 나랑 만날 때면 중국어보단 한국어를 쓸 때가 많아 어려웠을 건데도 말하는 게 느려 답답하지 않냐던 착한 내 친구다워요. 이제 우리는 서로가 존재하는 서울과 타이페이를 만들었으니 공유할 수 있는 게 더 늘어난 거잖아요. 내가 대만을 떠나고 나면 우리는 1500km 너머에서 서로를 생각할 거고 그 마음은 분명 가 닿아 따스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만나 내 마음이 전달됐냐고 묻는 유치한 일은 하지 않을래요. 그러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거든요.


잠깐 다른 하늘로 옮겨온 9개월 동안 많은 것이 변하고 성장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늘 그랬듯 종알종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할래요. 그러면 늘 그랬듯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거들어주세요. 많은 말을 해주지 않아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아니까 내가 여기로 떠나오기 전처럼 무뚝뚝하게 그래도 괜찮아요. 애써 말하지 않아도 그게 나름의 표현 방식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도 오랜만이라 반가운 기색이 비치면 더 행복할 것 같긴 하지만요. 떠날 날이 다가오지만 그건 한 편으로 돌아갈 날이 되기에 슬퍼하지 않을래요. 아 그리고 우리 만나는 날은 꼭 고기 먹으러 가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같이 먹을 거니까, 그게 더 중요하잖아요.


비가 오는 날은 항상 당신을 생각해요. 곧 있으면 다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거니까 그때까지 아프지 말고 잘 지내요. 이상하게 어느 면에서는 덜렁거리곤 하잖아요. 추우니까 옷도 따뜻하게 입고 감기도 조심하고 그렇게 서로 잘 지내다가 다시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하기로 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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