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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각달

마음의 무게

넘칠 만큼 따뜻하고 매몰되지 않을 만큼 가까운

by 디어





해외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간 쌓아왔던 모든 인적 네트워크를 잠시 멈춰 놓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1년 가까이 타지에 나와 있다 보니 좋은 방향이든 아쉬운 방향이든 한국에서의 인간관계가 일정 부분 정리되더군요. '타지에서 혼자 외롭지 않아요?' 하고 묻는 분들도 많았구요. 이 부분이 걱정돼 선뜻 해외로 떠나지 못하는 분들을 생각보다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저는 원래 발 넓게 사람을 만나는 편이 아니에요. 깊고 좁은 인간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놓는 성격입니다. 외향적인 척을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 기가 빨려 혼자 충전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소위 개냥이과랄까요. 낯가림도 좀 있고 최근 몇 년간 정말 친한 친구들을 만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있을 만큼 벽도 세워요.


여기까지 들으시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혼자 대만에 갈 생각을 했지? 하는 의문이 드실지도 모르겠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혼자 굉장히 잘 놀기 때문에 스스로를 믿고 올 수 있었고, 한국에서 쌓아온 인간관계의 중심은 나의 부재로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대만에 처음 와서 아무것도 몰랐던 첫 주에는 동기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어요. 그동안 저를 보러 다녀갔던 사람들도 많았어요. 친구가 있으니까 가겠다는 말은 쉽지만 결국은 돈이 들고 시간을 내야 하는, 품이 드는 일이라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위해 그걸 기꺼이 감수해줬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고 무겁게 느껴졌어요. 멀리 있으니 보러 와주고, 어제 네가 좋아하는 걸 봤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는 마음은 절대 가벼운 게 아니라고요.


혼자 잘 적응하고 생활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대만에 와서 너무나 감사할 만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외로울 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부족한 스스로에 비해 인복이 많은 편이라고 늘 생각해요. 그렇지만 솔직해지자면 대만에서까지 이렇게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것도 각자 다른 모국어를 쓰는 각자 다른 문화에서 자라온 친구들을요. 모난 사람 한 명 없이 다들 늘 웃고 지내는 것도 좋고 제일 어린 편이라 듬뿍 예쁨 받는 것도 좋고 서로 도움이 필요하면 계산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도 좋아요.



최근 다 함께 태국에서 연말을 보내기로 했어요. 각자 귀국을 앞두고 바쁜 것도 있고 일하는 친구들의 휴가 문제도 있고 해서 6명이 함께 가는데 결국 다 다른 비행기를 예매했어요. 숙소를 어떻게 할까 하다 각자 방콕에 있는 지인들 얘기가 나왔어요. 저는 태국 친구들은 전부 대만에 있어서 방콕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요. 난 아무도 없는데? 난 너희밖에 없어! 하니까 불쌍한 루나라며 놀리기 바쁘더군요.



저는 이번이 첫 태국 여행이에요. 게다가 같이 가자고 백 번 꼬셔놓고 비행기표 사자마자 놀리니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나 버리지 마ㅠㅠ' 하고 보냈죠. 생각지도 못하게 저와 일정이 딱 하루 차이 나 하루 먼저 도착하는 친구에게 '나는 너 안 버려' 하고 바로 답장이 오더군요. 네, 저는 쉽게 감동 받는 여자에요.


흐려도 예쁜 단수이! 늘 나랑 함께 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장난으로나마 저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친구입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으니 사람 쉽게 믿으면 안 된다면서 한없이 예뻐해 줘요. 세상에 이런 사람만 있다면 정말 살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이에요. 고소공포가 심해 경사가 심한 계단조차 잘 못 내려가는 제 앞에 와서 어깨 잡으라고 내어주는 친구기도 해요.


한 친구와의 일화만 얘기했지만 사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돌아봤다가 친구들이 얼마나 애정 가득 담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지 느껴져 마음이 뭉클할 때가 있어요. 괜찮아, 루나니까 할 수 있어, 그런 말들을 듣고 있자면 저를 제 생각보다 대단하게 평가해주는 이 친구들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매번 모자라서 챙김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도움이 되고 싶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요.


너무 가까워지면 '관계'가 개인을 삼키고
너무 멀어지면 거리가 '고립'을 낳는다
/ 문학평론가 권희철



마음의 무게는 계산할 수 있는 걸까요? 나는 너를 32.34만큼 좋아해, 너는? 하고 물을 수 있는 걸까요. 어쩌면 나 얼마큼 사랑해? 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정량적인 답도 표현할 방도도 없는 문제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비단 사랑뿐 아니라 우리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관계 앞에 어리석어집니다. 그런 아둔함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기도 하고요.



결국 모든 것은 사람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천천히 올 한 해 대만 생활을 돌아다보면 친구들과 뭘 했고 여기서 누굴 만났고 함께 이런 일들을 했다는 생각이 먼저 나는 걸 보면요. 최근 청승이 떨고 싶은지 가끔 자기 전에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곤 합니다. 기름지고 달고 짠 대만 음식에 인생 최대 몸무게를 기록하고 있는 터라 1년 전에 비해 객관적으로 못생겨졌을지는 몰라도 사진을 보면 스스로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게 제 눈에도 보여요.



함께 만들었던 크리스마스 트리, 낑낑대며 한참 올라가 야경을 보며 축하했던 친구의 생일, 여행 가선 한없이 어린아이 같아지는 모습들까지 저는 저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과 함께 만든 추억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제가 조금 모자라도 그런 저를 넘실댈 만큼 채워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에 관계에 헌신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 그 사람들의 건강한 생각이 좋아요.



곧 대만을 떠나게 됩니다. 누군가 저에게 돌아오려니 많이 아쉽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네, 정확해요. 아직 떠날 날이 남았는 데도 많이 아쉬워요. 그런데 슬퍼하지는 않으려고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를 저로서 버티게 했던 한국의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거니까요. 동시에 돌아가게 되면 대만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런 역할을 해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우리는 오래, 천천히, 따뜻하지만 데이지 않는 소중한 관계를 유지해나갈 거예요.



어쩌다 보니 지금은 다각기 다른 하늘 아래 있지만 조만간 태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다 같이 만나게 되겠죠. 그 때면 다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고 그리운 친구들에게 오늘은 달이 예뻐서 보고 싶었다며 괜히 한 번 연락해볼래요. 오늘 밤은 정말 예쁜 반달이 떴으니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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