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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각달

사소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2016년 12월 타이페이 어딘가로부터

by 디어





1.

여유로운 일요일입니다. 대만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휴학생은 매일매일이 한국보다 훨씬 여유롭지만 그렇다고 주말이 주는 특유의 나른함이 없는 건 아니에요. 어쨌거나 주중에는 여전히 수업이 있고 나름대로 일을 만들어 바쁘게 돌아다니기도 해요. 휴학생의 특성상 풀어지지 않으려 일부러 주중에 일을 몰아놓는 이유도 있고, 푹 쉬고 게으르게 생활하면서 잉여다움을 즐길 수도 있는데 그것도 1년 내도록 할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요즘 관심사 중 하나는 '과연 대만을 떠나기 전에 식량 창고를 얼마나 비울 수 있을지'입니다. 여름에 잠깐 한국을 다녀오면서 이것저것 사 왔는데 생각만큼 빨리 줄어들질 않더라구요. 햇반만 빛의 속도로 사라지고 - 한국인은 밥심! - 나머지는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녁으로는 창고 정리(?) 일환으로 김치볶음밥을 해보기로 합니다. 치즈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없어서 아쉬운 대로 김이라도 잘게 부숴 넣었어요.



노트북과 여행 일정이 담긴 공책을 챙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집을 나섰어요. 단골 카페까지는 10분도 안 돼서 도착하지만 시원한 저녁 바람에 기분이 좋아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어요.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어반자카파의 목요일 밤, 지금 날씨와 기분에 완벽한 선곡이에요.



KakaoTalk_20161115_205509592.jpg 소개한 적 있었던 바로 그 카페에요! Cafe 8mm



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착한 단골 카페는 늘 그렇듯 조명이 약간 어둡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저녁 시간이라 근처 거리들에 활기가 넘치는 반면 여기만 서행 표시가 붙어 있는 것처럼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제가 좋아하는 친절한 알바생이 있네요. 못해도 일주일에 사나흘은 가는데 저를 모를 리 없지만 절대 말은 걸지 않는 무뚝뚝한 매니저님도 있습니다. 눈이 마주쳤어요.


저 손님께 오늘은
쉐이크 종류 없다고 말씀드려.



전혀 의외의 말이었어요. 여전히 무심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나를 기억하는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졌어요. 저는 몇 달을 그렇게 자주 가도 항상 무표정에 저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길래 내심 그 매니저님이 약간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제가 자주 주문하는 메뉴를 기억하고 알바생에게 일러주시다니요. 여전히 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답니다.




2.

어제 일주일 만에 필리핀에서 돌아온 친구, 논문을 쓴다고 잠시 실종됐었던 친구 그리고 저를 버리지 않겠다던 다정한 친구까지 넷이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내내 둘이 놀다가 친구들이 돌아와서 모처럼 다 같이 저녁 먹겠구나 싶어 그것만으로도 이미 들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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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맥주의 크리스마스 버전이 나왔어요! 차이잉원 총통 취임 기념도 나오더니 아기자기 대만스러워요.



태국 이야기 아직 기억하시나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나 공항으로 데리러 와!' 했던 말이 점점 현실이 되어 가는 중입니다. 인도 음식으로 행복하게 배를 채우고 편의점에 앉아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그 다정한 친구가 '루나, 그래서 비행기 언제라구?' 하고 묻는 겁니다. 그 말도 다정한데 '하루 더 먼저 도착하는 친구한테 연락해서 같이 데리러 가게.' 덧붙이는 말이 더 감동이라 헤헤 거리며 전자항공권을 찾아 보여줬어요. 사실 그렇게 셋이 정말 친하거든요.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막 에어비앤비를 결제한 참이었어요. 첫날은 같이 머물 친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혼자 있어야 하는데 그럼 첫날은 우리가 가 있을 테니 같이 있자고 하더라고요. 난 너희밖에 없다는 말은 사실 장난에 더 가까웠는데 정말로 저를 위해 다 해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한없이 받고만 있는 성격이 아닌 데도 한없이 받게 되는 친구들의 다정함은 저에게 매일 작지만 커다란 행복이 돼요.



대만을 떠나도 다시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게끔 작은 도전을 계획하고 있는데 뜻처럼 잘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인 데다 온전히 제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라 미리 얘기할 수도 없고요. 그래도 잘 돼서 제가 좋아하고 아끼는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 것조차 저에게는 소소한 행복이기도 했고요.




3.

귀국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그전에 여러 계획이 있기 때문에 미리 방을 내놨어요. 방을 내놓는 타이밍이 아직 학기 중이라 생각만큼 연락이 잘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덕분에 내놓기 전에 사진 찍는다고 정리며 청소를 전부 다시 했어요. 낮에 한참 열심히 청소하고 뿌듯해진 마음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데 꼭 이 집으로 처음 이사 온 날 같더라고요.



사실 요즘 부쩍 그런 느낌을 받아요. 길을 걷다 뭔가 모를 기시감에 가만 생각해보면 꼭 대만에 처음 왔을 때만 같아요. 일단 길고 긴 여름이 지나 그때처럼 조금 선선해진 날씨 탓도 있겠고 - 요즘은 날씨가 정말 사랑스러워요 - 방을 내놓고 물건을 정리하면서 떠난다는 실감이 나서 청승이 떨고 싶어 그런 걸 수도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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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는 다양한 매개가 있지만 저는 주로 청각과 후각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요즘은 일부러 대만에 처음 왔을 때 들었던 음악들을 듣고 있어요. 처음 이사 왔을 때 걸었던 길을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아티스트가 의도한 음악의 색에 제 기억의 색들이 덧입혀지곤 해요. 처음 이 케이크 가게 발견했을 때 진짜 기분 좋았는데, 그 날 초콜릿 쿠키를 받았었나? 그런 기억의 보물 찾기를 하는 최근입니다.



처음 살았던 종허에서의 기억이 회색으로 칠해진 것 같다고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모든 게 낯설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당시 들었던 음악도 그렇고요. (물론 그 기억들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이사 올 때쯤 여름에 발맞춰 한층 밝고 시원한 음악들을 들으며 기억도 다시 컬러링된 기분이에요. 요즘은 그간 지내며 두리뭉실하게 그려뒀던 수채화에 음영을 넣는 중입니다. 여긴 이렇고 저긴 저렇고, 먼 훗날 다시 꺼내봐도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를 수 있도록요.



다음 정거장은 어디가 될까요? 2년 전 처음 여행으로 대만에 왔을 때 2년 후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을 거라고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으니 다음 정거장도 왠지 생각지 못한 특별한 곳이 될 것만 같아요. 일단은 졸업을 위해 한국에 돌아가야 하지만 그마저도 어쩌면 새롭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두근거리고 설레요. 막상 가면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

저는 밝고 긍정적인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때 그 순간에만 오는 것들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글이든 사진이든 열심히 기록해서 할 수 있는 한 그 순간을 붙들어 놓으려는 사람이기도 해요. 친한 언니와 첫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감사 릴레이'를 할 일이 있었어요. 3일 동안 매일 감사한 일을 세 가지씩 써야 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생각보다 감사할 일이 많더군요. 그때 이후로 우울하고 힘들 때면 한 번씩 감사 일기를 쓰곤 해요. 처음에는 이런 걸 써서 뭐하나 싶었는데 쓰다 보면 힘든 일들이 별 것 아니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 좋은 면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얼마 안 가 대만을 떠나야 하는 12월의 나는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기록해두려고 시작한 글이었는데 쓰다 보니 그때의 감사 일기가 떠올랐어요. 내년 12월의 저는 어떤 글을 쓰며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요? 연말이 다가오니 올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한 번 써보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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