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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를 좋아하세요?

전 엄청 좋아하는데 말이죠

by 디어



근 1년 만에 다시 타이페이에 갔다.



그동안 대만에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건 아니다. 지난 4월에는 주말을 이용해 가오슝에 다녀왔고, 그때도 약간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충분히 대만을 느꼈고 먹었고 걸었다고 생각했다. 2017년 초 귀국한 이후 매년 한 두 차례씩 대만행 항공권을 끊을 때마다 지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또 대만이야?’, ‘자주 가네’ 같은 말들. 이제 여행으로 간다기보단 타향살이하는 직장인이 쉬는 날마다 집에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임에도 그들의 관점에서 대만이 여행지라 그런지 매번 비슷한 반응이 돌아온다. 개중에는 내 돈을 대신 아까워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버는 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귀국 후 여러 번의 대만행과는 좀 달랐다. 말하자면 이 여행을 대하는 나의 태도(또는 내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가 그랬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일단 혼자 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처음 타이페이에 여행 갔을 때도, 귀국 후에도 대만을 갈 때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였다. 돌이켜보니 혼자서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3년 전과 이번뿐이었다.



타이페이 미라마.JPG 타이페이 미라마. 이 날은 날씨가 정말정말 좋았다.



3년 전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대만으로 떠났다. 평소 여행을 다닐 때도 늘 단출하게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별로 챙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6개월치 짐을 꾸리기 위해서는 커다란 이민가방과 기내용 캐리어, 백팩이 모두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셋 다 끔찍하게 무거웠다. 이민가방과 캐리어를 차치하더라도 일단 백팩 안에 핸드캐리 할 수밖에 없는 1.69kg짜리 노트북과 아이패드가 들어있었고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체구가 작은 나는 이미 충분히 힘들었다.


비행기에서 앞자리에 앉았던 거구의 외국인 아저씨가 스윗하게 캐리어를 올려주고 내려주지 않았다면 (심지어 내릴 땐 물어보지도 않고 당연하게 짐을 내려준 뒤 인사도 안 받고 쿨하게 떠나셨다.) 나는 숙소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한 손으로는 잘 끌어지지도 않는 커다란 이민가방과 캐리어를 양손에 끌고 낑낑대며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그곳이 집을 계약하기 전 고작 일주일 정도 머물 게스트하우스였는데도. 타이페이와 나는 그렇게 만났고, 그 후로 일주일을 내리 아팠다.



대만 단수이.JPG 사랑해 마지않던 단수이



당연한 말이지만 대만에서 보냈던 1년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건 이번 여행을 앞두고 우연히 읽게 된 3년 전의 일기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빼곡한 글씨로 순간의 감정을 가감 없이 털어낸 글자들 위로 부끄럽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때의 내가 아주 솔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만에서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은 항상 숨기고 싶었던 장면의 민낯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좋았던 때도, 나빴던 때도 그 감정이 가장 극점을 찍어서 그랬던 걸까.


어느 순간 타이페이에 가는 게 권태로워졌다. 매번 같은 친구들을 만났고 익숙한 동네에 숙소를 예약했으며 대만에서 살 때 자주 가곤 했던 가게를 찾아 저녁을 먹었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하기에 직장인의 휴가는 늘 짧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타이페이에 가는 게 싫어졌다는 건 아니다. 올 때마다 마치 어제까지 여기 살았던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친구들의 존재가 감사했고, 이제는 눈을 감아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골목들이 있다는 게 좋았다.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과 권태로움이 있을 뿐이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것들이 갑자기 확 변해버리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그랬다. 귀국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구글맵에 찍어둔 별표에 ‘폐업’ 표시가 뜨는 경우가 생겼고, 이번에는 유난히 많았던 것 같다. 우연찮게도 내가 모르는 타이페이를 발견해보자는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에서 일찍 잠드는 도시인 타이페이에서 12시까지 불을 밝히던, 그래서 더 귀했던 카페가 문을 닫은 걸 알았을 때 고작 두 글자에 왜 그렇게 마음이 서글퍼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타이페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타이페이가 추억 속의 한 장소로 남지 않고 내가 계속 더 좋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구석구석 다 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사실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 계속 찾아와서 더 알아보고 싶게끔 하고 싶었다. 자주 지나쳤지만 천천히 둘러본 적은 없었던 동네에 숙소를 잡고, 구글맵을 촘촘하게 뒤졌다. 처음 왔을 때처럼 부지런히 걸어 다닌 골목들이 내가 왜 이 도시를 좋아했는지 다시 일깨웠다. 수도 없이 지나다닌 골목 뒤에 이런 가게가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고, 매번 망설이기만 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가게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바텐더에게 말을 걸까 하다가 끝내 입을 떼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기까지 들어왔으니까.


좋아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은 품이 드는 일이다. 도시에, 사람에, 취미에 푹 빠져 좋아하는 일도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고, 내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난 무언가 하나를 진득하게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는 것도 충분히 재능이다.



대만 타오위안 공항.JPG



돌아오는 봄에 다시 타이페이에 간다. 타오위안 공항의 하얀 천장만 봐도 집에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나는 타이페이가 이번에 내게 무엇을 보여줄지 참 궁금하다. 여행은 우연의 연속이기에 내가 아무리 빠듯하게 일정을 짜고 계획을 세워도 결국 그 도시가 내게 선물하고자 하는 장면이 강렬하게 남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미 기억에 새겨진 그 장면이 그리워 언제고 다시 타이페이로 돌아오게 되겠지. 한 도시를 여러 번 여행한다는 것은 그리워할 장면을 자꾸 만들고, 또 선물 받는 게 아닐까.




※본 글은 개인 블로그(https://lunainblue.tistory.com/12)에 동일하게 업로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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