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킹홀리데이 해부 : 주거
전공 수업 때 청년 주거 문제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독립할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파트너였던 언니가 '청년 주거'를 주제로 하자고 했을 때 솔직히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자취는 자취고 기숙사는 기숙사지, 별로 다룰 것 없을 것 같은데 분량 충분히 나오려나? 딱 그만큼의 안일한 생각.
막상 발표 준비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얼마나 무지했는지에 대해 깨닫게 됐다. 분량이 충분하기는 무슨, 넘쳐나서 자르는 데 힘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때야 비로소 친구들이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평당 가격을 감당하면서 최저 주거 기준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부끄러웠다. 자취며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을 조금 더 배려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학점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여러모로 가장 내게 인상이 강렬했던 수업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4개월쯤 후, 나는 대만에서 첫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여긴 전세 개념이 없어 렌트 아니면 매매인데 대부분 보증금이 두 달치 렌트라는 아주 조금 인간적인 면모를 제외한다면 한국 만큼 소득 대비 집값이 미쳐있는 나라 중 한 곳이다. 무튼 3개월쯤 신베이(New Taipei city)에서 자취를 한 후에 타이페이의 셰어하우스 마스터룸으로 이사했다. 무지력 만렙에서 1년도 안 돼 생애 첫 자취도 모자라 셰어하우스까지 경험한 셈이다.
물론 해외에서 경험한 자취에 셰어하우스이니 한국에서와 100%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큰 맥락은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화도 말도 전혀 다른 유러피언들과 함께 살았으니 조금 더 다이나믹할 수는 있었겠지만. 셰어하우스 입주를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경제적 이점 : 같은 돈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좀 더 나은 주거 환경
- 아마도 셰어하우스에 입주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국에서 전세를 산다고 했을 때 워낙 보증금이 비싸니 나눠서 부담하면 내가 가진 예산에서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셰어하우스는 아파트나 빌라를 통째로 렌트하는 경우가 많으니 거실이나 부엌, 이외 부대시설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원룸보다 좋을 수 밖에 없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사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자취방에 부엌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만 원룸에는 대부분 부엌이 없다.) 이사 후에 부엌, 거실, 다용도실이 생겼고 집에서 나갈 필요 없이 편하게 빨래와 건조를 마칠 수 있게 됐다는 점은 큰 장점이었다.
- 대부분의 셰어하우스는 보증금 부담이 덜하고 월세도 조금 싸다. 글을 준비하면서 혹시 한국의 사정과 너무 동떨어진 글을 쓰는 게 아닌가 싶어 대표적인 셰어하우스인 '우주(WOOZOO)'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해봤는데 역시나 혼자 원룸에 사는 것보다는 경제적으로 조금 아낄 수 있는 가격을 봤다. 대만에서도 동네 근처의 비슷한 렌트를 내는 방들과 비교했을 때 내 방은 꽤 넓은 편이다. 셰어하우스는 소위 말하는 가성비 면에서 강점이 있다.
2. 집에 누군가 있다는 것
-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지만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면을 먼저 말해 보려고 한다. 여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혼자 사는 건 걱정할 요소가 많다. 어쩌면 한국보다 조금 더 안전한 대만에서도 혼자 살면서 가끔 문소리에 예민해지곤 했는데 한국에서야 말해 뭐하겠나 싶다. 남자 셔츠나 신발을 갖다 놓는 일도 있는데 혼자 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안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심리적인 안정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 대만은 택배가 왔는데 여러 번 부재중이면 직접 가서 찾아와야 하는데 집에 하메가 있어서 이런 수고를 던 적이 있다. 집에 한 명쯤은 있는 경우가 많으니 택배를 대신 받아줄 수도 비 오는 날 창문을 대신 닫아줄 수도, 열쇠를 까먹고 나왔을 때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 괜히 혼자 밥 먹기 싫은 날 룸메에게 같이 밥 먹자고 해도 되고 심지어 우리는 서로 깨워준 적도 있다. 나 커피 내렸는데 같이 마실래? 하는 건 다반사다. 울고 싶은 만큼 힘든 날 집에 왔는데 까맣게 불이 꺼진 적막이 아니라 누군가 왔어? 하고 반겨줄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3.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 셰어하우스의 장점이자 입주 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성격이 엄청나게 내성적이라 모르는 사람에게 말 한 마디도 못 붙일 정도라면 솔직히 셰어하우스를 추천하고 싶지 않다. 입주하는 순간부터 하우스메이트라는 새로운 관계가 생길 뿐더러 하우스메이트들의 친구들과 어울린다든지 해서 인간관계를 넓힐 일이 많은데 매번 거절하는 것도 서로 어색한 일이다. 나도 많이 외향적인 건 아니라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이런 건 아니었지만 본인이 극단적으로 내성적이라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 나는 지금 크로아티안&더치 커플, 터키 남자애와 같이 살고 있다. 다 다른 나라에서 온 덕에 전혀 다른 문화에 대해 얘기해볼 때면 재밌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별 거 없이 맥주 한 캔 놓고 수다를 떨거나 태풍 때문에 집에 갇힌 날 냉장고를 털어 다같이 요리대잔치를 벌인 적도 있다. 서로 친구들과 나가 노는데 같이 갈래? 해서 데려간 적도 있고.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살고 있으니 좀 더 자유로울 수는 있겠지만 셰어하우스에 산다는 건 일단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뜻이다. 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 배우는 점도 많다. 마음이 잘 맞아 정말 좋은 친구가 되면 더 좋은 일이고!
1. 하메들과 잘 맞지 않을 때
- 우리 하메들은 극단적으로 다른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다. 나랑 터키 남자애는 새벽 5,6시쯤 잠들어서 오후 12시는 돼야 일어나고 크로아티아 여자애는 늦어도 8시에는 출근한다. 더치 아저씨는 재택 근무를 하시는 덕분에 중간 정도. 우리는 각자 방을 쓰고 있으니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지만 2인실 이상을 들어간다면 고려해볼만한 문제다.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완전 야행성인데 상대는 완전 아침형이라면 아무리 조심해도 부딪힐 수 있다. 각자 쓰는 우리조차도 내 방은 현관에서 가장 가까워서 가끔 누가 나가는 소리에 깨곤 한다.
- 한 번은 룸메 중 한 명이 술을 마시다 친구들과 새벽에 들어온 모양인데 나는 그 날 너무 아파서 9시부터 기절하듯 자고 있었다.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는데 크게 음악을 틀고 왁자지껄 웃는 바람에 새벽 3시에 깨서 진심 머리 끝까지 화가 났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런 적 없긴 하지만. 사실 상식적인 선에서만 서로 배려하면 괜찮은데 주변 셰어하우스 얘기들도 들어보니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상식선이 존재하더라는 후문. 내 집인데 내 집 안 같을 수 있다.
2. 어쨌건 공동 생활
- 2n년 넘게 서로 완전히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끼리 같은 집에 모여 사는데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다. 드라마 '청춘시대' 첫 화를 보면서 엄청 공감했는데 다 한 번쯤은 일어날 법한 일들이다. 세탁기를 쓰려고 하는데 이틀째 빨래가 들어있다든가, 냉장고에 한 캔 남아있던 맥주가 납치 당했다든가, 다용도실에 놔둔 세제가 가벼워졌다든가. 누군가는 하루 종일 집에 있고 누군가는 매일 나돌아다녀도 어차피 공과금은 n분의 1이다.
- 우리 집의 경우 각자 렌트를 내는 게 아니라 main tenant가 취합해서 한꺼번에 집주인에게 부치는데 공식적인(?) 렌트 페이는 10일이더라도 9일 밤에는 놔둬야 출근하는 길에 부칠 수 있었다. 누군가 한 명 늦으면 사비로 내고 나중에 받아서 메꿔야 하는 셈이었다. 혼자 살면 잘못해도 내가 책임지면 그만이지만 만약 내가 main tenant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짜증 난다. 셰어하우스에 살면 개인의 자유에 앞서 공동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룰들이 생긴다.
- '완벽한' 개인 공간이 없다는 점도 단점 중 하나. (룸메들은 그닥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한 번도 이어폰 없이 뭔가를 본 적이 없다. 각자 방이 있을 땐 어느 정도의 사생활은 보장되지만 혼자 사는 것만큼 완벽할 수는 없다. 나는 화장실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어서 마스터룸을 렌트했다. 자기가 어느 정도까지 공유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
3. 공유지의 비극
- 함께 쓰는 물건들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일명 공유지의 비극. 같이 쓰니 약간 무뎌지는 것도 있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것도 있다. 우리 집에서 제일 빨리 사라지는 건 주방 퐁퐁과 수세미, 한국에 들어갔다온 새 세탁기가 고장나 있던 적도 있었다. 셋이 함께 쓰는 거실 화장실은 휴지도 엄청 빨리 사라진다고 들었다. 우리는 그 때 그 때 유연하게 알아서 채우는 편인데 처음부터 깔끔하려면 아예 공금을 내서 관리하는 법도 있다. 너는 하루 종일 집에 있고 나는 아닌데 어떻게 같을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면 나만 피곤해진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무던한 사람이 셰어하우스에 최적화된 사람인 것 같다.
생활의 질에 있어 집은 두말할 것 없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매일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3개월 간의 자취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셰어하우스 생활 동안 처음 해보는 일들도 많았고 깨지고 기분 나쁜 일들도 있었고 좋은 추억으로 남은 일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느꼈던 대표적 장단점들만 적었지만 분명 그 전에 고려해 볼 지점들이 더 있다. 집은 무조건 편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인데 각자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어떤 점들이 필요할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도 분명 완벽하고 이상적인 룸메는 아니었을거라 함부로 조언할 수는 없지만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해야 한다. 앞서 얘기했던 맥주 납치 사건 때 기분은 나빴지만 룸메들에게 내 칸에 (우리는 서로 물건에 표시가 없는 대신 각자 사용하기로 한 칸이 있다.) 놔뒀던 맥주가 사라졌다고 얘기했더니 한 명이 자기 친구가 어제 놀러와 모르고 꺼내 마신 것 같다며 새로 사준 일이 있었다. 같이 부대껴 사는 만큼 늘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적당히 이해하고 적당히 배려해야 한다. 대신 내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다면 얘기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말하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셰어하우스는 청년 주거 문제에 있어 항상 언급되는 대안 중 하나다. 경제적으로 부담된다면 분명 좋은 선택지기도 하다.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좋은 셰어하우스에 들어가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꼭 꼼꼼하게 따져보고 입주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