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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Sep 08. 2020

피해자를 변호하다

#4. 성범죄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가요?

#4. 성범죄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가요?


대부분의 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법에서 정한 범죄 행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저절로 피해자의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데 유달리 성범죄에 관해서는 피해자가 되는 데 보이지 않는 자격이 존재한다. 그것은 때로는 피해자의 직업이나 피해자가 피해 이후 한 행동,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이후 가해자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다음에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지 등, 여러 가지 요소들로 '당신이 정말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캐묻는다. 현실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아직도 다양한 형태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자격요건을 따져 묻고, 그것으로 범죄 성립 유무를 판단하고 있다. 과연,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범죄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 이외에도 정말 다른 요건이 필요한 것일까?


나와 윤후는 같은 과 동기였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나는 그 애와 과 동기로서 잘 지내고 있었고, 그 애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애에 대해서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전혀 없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윤후가 왜 유달리 친절할까에 대해서 애써 모른 척하는 방법으로 나는 그 애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과 엠티가 있었던 날, 여느 대학의 엠티가 모두 그렇듯 우리는 밤 10시가 되기 전에 모두 엄청나게 취했고, 취기가 오른 나는 여자 방으로 지정된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렸으나 당연히 여자 동기들일 거라고 생각했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잠을 자려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이불속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옆으로 돌아 누워 있던 나는 놀라서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했고, 얼굴을 확인 한 그 짧은 순간에 윤후는 내게 키스를 하려 했다. 놀란 나는 여학생 방에 있던 화장실로 급하게 도망갔고, 윤후는 그런 나를 따라 들어와 내게 강제로 키스를 하고 뿌리치려는 내 손목을 붙잡고 내 가슴을 만졌다. 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동기들은 술에 취해 바다를 보러 나간 건지 아무도 여학생 방에 들어와 보지 않았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애를 밀쳐내고 밖으로 나왔다. 당황한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와 한 참을 밖에 앉아 있었다. 이걸 선배에게 말해야 하나, 내가 지금 당한 일이 뭘까. 혼란스럽고 치욕스러운 밤을 겨우 보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나는 선배에게 윤후와 다른 차로 올라가고 싶다고만 말했고, 그렇게 나는 학교 앞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나는 그 애가 취해서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기억을 하면서도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너 혹시 어제 일 기억나?"라고 묻자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나 너무 취해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라고 답을 했고, 나는 그 애에게 "너 정말 나한테 큰 잘못 했어. 네가 알면 너도 정말 죽고 싶을걸. 이따 만나서 이야기해"라고 하자 그 애는 무슨 일인지 깊게 알고 싶지 않지만 예의 상 묻는 것 같은 태도로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 내일 학교에서 보자는 말로 그 대화를 끝냈다. 


그 이후 나는 그 애에게 그날의 자세한 피해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학교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되기도 했고, 그 애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애는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여자 친구와 잘 지내보려 해도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나를 정말 좋아한다고 여러 차례 술에 취해 고백을 했다. 사귀자는 그 애의 고백을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그 애는 끈질기게 나에게 구애를 했다. 나는 그 날 받았던 충격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였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 애가 다섯 번째 내게 고백했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래, 그 날 일도 얘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걸 거야. 얘랑 사귀다 보면 그때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까?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다고 하면 내 마음이 조금 풀리지 않을까?'라고 잘못된 생각을 했고, 그 애와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애와 사귀게 난 이후에 도리어 나는 그 날의 트라우마에 매일 시달리게 되었다. 그 애가 손을 잡는 가벼운 스킨십을 했을 뿐인데도 나는 그날 느꼈던 공포가 돼 살아났고, 결국 둘만 만나는 데이트를 되도록 피해고, 예전처럼 과에서 단체로 모이는 자리에 동석하는 것으로 그 애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리고 사귄 지 50일 정도 되었을 때 그 애는 내게 남자 친구인 자신을 왜 이렇게 피하냐며 다그쳤고, 나에게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내 자취방 비밀 번호를 집요하게 물어왔고, 나는 알려주려 하지 않았지만 과 술자리에서 많이 취한 어느 날 나를 데려다준 그 애는 취한 내게 문을 열어준다며 비밀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고, 그렇게 내 자취방의 비밀번호까지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나는 도저히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애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 애는 쉽사리 나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지만, 그 사이 나는 같은 과의 후배와 교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내 남자 친구였던 같은 과 후배가 내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 때 내 집의 비밀번호를 밖에서 누르는 소리가 났고, 그 애는 내 자취방 문을 허락도 없이 열고 들어왔다. 나와 남자 친구가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한 그 애는, 과에 이상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과 교제하고 있는 도중에 양다리를 걸쳤고 내가 나체의 몸으로 현재의 남자 친구와 있는 모습을 자신이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엠티 때 내게 했던 성폭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 내가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말했다는 이유로 그 애는 나를 과에서 매장시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참고 있을 수 없게 되었고 기억하기도 싫은 그 날의 일을 수면 위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애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했다.


피해를 입은 다음 날, 내가 그 애에게 보낸 카톡에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 엠티에서 그 애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 이후 그 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내게 사과 비슷한 걸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경찰에 그 애를 신고한 것 이후 내가 이 사건에 피해자로 인정받는 데 특별한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날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던 그 애는 경찰에서부터 큰 로펌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그 날의 모든 일을 부인했고,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그렇게 긴 재판은 시작되었고, 나는 이제 내가 피해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나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상대방 변호인은 집요했다. 우리가 엠티를 갔던 숙소에 직접 내려가서 화장실에서 소리를 질렀을 때 밖에서 어떻게 들리는지까지 녹음해 와서 재연했고, 나의 대학 생활 전부를 해부해서 재판정에 널어놓기 시작했다. 


상대방 변호인은 내가 성범죄 피해자가 아님을 증명해서 피고인이 된 그 애의 무죄를 증명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보통의 성범죄 피해자라면'으로 시작하는 그 변호인의 변론을 듣다 보면 나는 성범죄 피해자라면 하지 않을 모든 행동을 했고, 보통의 성범죄 피해자라면 했어야 하는 모든 행동을 하지 않은 셈이었다. 


증인석에선 나에게 수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사건과 직접 관련된 것은 거의 없었다. 전부 나의 태도와 관련한 것이었다. 

증인은 사건 이후 피고인과 교제한 적이 있나요. 증인은 사건 이후 피고인과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있나요? 증인은 피고인과 교제 중에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있나요. 증인이 피고인을 고소한 것은 피고인이 증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내고 다닌 다고 생각해서가 아닌가요. 증인은 왜 강제추행을 당하고도 아무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나요. 증인은 강제추행을 당한 다음날 왜 먼저 피고인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것인가요. 증인과 현재 남자 친구가 나체로 있는 모습을 피고인이 목격한 것이 맞나요. 증인은, 증인은, 증인은...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하고 나자, 나 자신조차 내가 성범죄 피해자가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그때 바로 신고하지 않았을까. 왜 그때 피고인이 사귀자고 하는 것에 응했을까. 왜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그 애에게 말해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을까. 그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나는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나는 피해자가 될 자격이 없는 애였다. 증인신문을 망쳤다는 확신이 들었고, 나의 피해자 변호사님은 내게 증인신문에 대해서 판사님께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써보자고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고 패배감과 무력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 이후 당연하게도 나는 재판에 유리할 만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 사이 그 애는 나를 무고죄로 고소했다. 내가 피고인이 나에게 불리한 내용의 소문을 내고 다닌 다고 착각해서 있지도 않은 피해를 만들어 나 자신을 고소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고죄의 피해자가 된 그 애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도 아니지, 당연히도 나에 대한 무고죄는 검찰에서 혐의 없음 처분이 났다. 그렇지만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것은 나였다. '윤후 무죄 판결받았대'. '정말 없는 걸 만들어서 신고한 거래?'라고 떠도는 소문의 말들에 귀를 닫고 학교를 다닐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학교를 휴학했고,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녔다. 끝까지 피해자는 나였지만, 아무도 내게 피해자라고 해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정말 그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확신이 없어졌다. 끝없는 자책감에 나의 일상은 모두 망가졌고, 나는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어야 하는 스물한 살을 내가 성범죄자의 피해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라도 입증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절망감으로 모조리 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제 와 다시 돌아봐도, 그날의 추행은 엄연히 존재했고, 나는 성범죄의 피해자임이 명백했다. 그런데 법은, 또 세상은 내게 너는 왜 '일반적인'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대체 일반적인 성범죄 피해자들의 행동지침은 무엇일까. 나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서, 그 애가 진심으로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그 피해를 잊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내 행동은 성범죄 피해자가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까? 지금도 누군가는 친구에게, 동기에게, 동료에게 그런 피해를 당하고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나와 같은 방법을 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모든 성범죄 피해자의 마음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데, 누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너는 성범죄 피해자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니 성범죄의 피해자 일리 없고, 그러니 네가 한 말은 다 거짓이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사건 이후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성범죄의 피해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내가 피해자 임을 입증해야 한다면 나는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누군가 강도를 당했는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닌 '피해자가 그 날, 그날 이후 어떻게 행동했는지'로 강도를 저지른 자의 죄가 유죄에서 무죄로 뒤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성범죄의 피해자가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가해자에 대해 적개심만을 표현하며 정신과에서 약물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니다. 상흔은 모두에게 다르게 남는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각자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우리가 성범죄의 피해자에서 성범죄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자 다움'으로 우리를 가두는 또 다른 폭력의 잣대를 거둬들여야 한다. 가해자에게 웃으며 말을 건 피해자의 내심을 들여다 보면, 가해자의 면전에서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마음보다 더 깊게 상처 받았을 수 있다. 


가면 뒤에 숨어있는 피해자에게 나와서 네가 피해자임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보다, 가면을 쓴 가해자의 범행을 파헤치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는 훨씬 쉽고 안전하고 당연한 길이 아닐까. 


피해자 답지 않은 피해자였던 나는, 피해자라는 마음의 감옥에서 이제는 나가고 싶다.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날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내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인정받음으로써. 이제 다시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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