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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Sep 07. 2020

다시, 이팝나무 꽃이 필 때까지

#2. 오늘은 아무것도 되돌아보기 싫지만 

2020. 5. 21. 그 날이 지난 지 세 달이 넘게 흘렀다.

시간 순서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 내려가고 싶었는데, 도무지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진단 이후 한 달 동안은 매일 울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매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를 슬픔에 잠겨서 보냈다. 

그 이후에는 아빠의 치료 방법에 대해 세 자매가 매일 매시 매분을 고민하며 보냈다. 항암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터넷을 뒤지고 논문을 찾아 읽고, 구충제 요법을 찾아봤다. 


3차 항암이 끝나고 나서였을까. 아빠는 항암 부작용으로 매일 병든 닭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계셨다. 누워있거나 앉아서 고통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암이 아니라 항암이 아빠를 곧 잡아갈 것 같았다. 항암에 대해서 찾아봤다. 정상세포보다 훨씬 독한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은(절대 항암은 치료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빠의 멀쩡한 세포도 전부 파괴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처럼 한 번 갔던 길은 잊지 않았던 아빠, 아직도 윤동주의 시를 외우고 있었던 아빠는 점점, 여러 차례 같은 질문을 반복하기까지 했다. 항암은 아빠에게서 머리카락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었다.


4차 항암 도중에 중간 경과를 보기 위해 복부 시티를 다시 찍었다. 아직 시티 리딩을 하기 전이 었지만, 주치의는 입원 병동에 찾아와서 설명했다. 암의 크기가 줄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보기엔 암세포의 모양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아빠 같은 말기암의 경우에는 치료의 목적이 암의 사이즈를 줄여서 완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퍼지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임을 고려할 때, 긍정적인 결과라고 말했다. 또다시 나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아빠를 힘들게 하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는 이 치료로 암세포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니.


나는 지방에서 산부인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사촌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미 수 차례 수십 가지의 질문을 한 뒤였다. 언니에게도 암환자가 있었고, 혈액종양내과의 절친도 있었다. 언니는 아빠가 부작용이 그렇게 심한데 암 사이즈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면 항암제를 바꾸는 것을 추천했다. 의사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항암제를 바꾸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1차 항암제의 경우 중증환자등록으로 특례가 적용되어 환자의 부담은 치료비의 5 프로지만, 2차 항암제의 경우부터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1회 치료에 수십에서 수백만 원의 비용이 든다) 그러나 2차 항암제는 지금보다 약한 놈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치료가 먹히지 않는다면 다음 것이 먹힐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절망에 절망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아빠가 일상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는데, 아니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처참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암의 사이즈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면 아빠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든 아빠는 2주에 한번 2박 3일 동안 몸에 독을 주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 독성에 괴로워하며 남은 시간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가 즐겨 보는 티브이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속세를 등지고 홀로 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엄마가 자주 보기에 나도 내용을 흘려들은 적이 많았다. 거기서 보면 암을 선고받고 산으로 들어와 암이 나았다는 스토리도 자주 등장했다. 나는 자연치유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저명한 교수가 쓴 책에서는 항암은 암환자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정상적인 세포를 죽여 면역력을 떨어뜨려 몸이 스스로 암세포와 싸울 힘을 빼앗아가고 결국 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암환자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항암의 정해진 결론이라고도 했다. 


아빠를 위해서 근교의 전원주택을 물색해 보기 시작했다. 자연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면역력을 증강시키다 보면 아빠가 암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빠는 단호했다. 항암을 하겠다고 했고, 아빠는 꼭 완치할 거라 했다. 나는 설득을 포기했다. 그리고 나도 두려웠다. 항암을 중단하자마자 암이 급속도로 아빠의 온몸에 퍼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점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항암이 아빠의 생명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지만 그 독약에 기대는 방법 외에는 사실상 아무런 선택지도 없었다. 


그 이후 외래에서 교수님과 만났다. 전공의의 설명과는 달리 아빠의 원발암인 췌장 미부의 암은 0.5센티 정도 줄어들었고 간에 전이된 암도 조금이지만 줄어들었다고 했다. 다시 희망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아빠에게 2프로의 기적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항암을 지속하는 것으로 우리 가족은 결정했다. 그 이후 홍수와 태풍으로 내가 찾아봤던 전원주택의 지역이 침수되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아빠는 우스갯소리로 '네 말 듣고 전원주택으로 갔으면 지금 이재민이 되어 있겠다'라고 했다. 아빠가 그렇게라도 웃는 게 좋았다.


그리고, 다음 주면 8차 항암이 시작된다. 다시 중간 시티를 찍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7차 항암 때 의사들은 파업을 했다. 피검사를 하긴 했지만, 누군가 짚고 넘어갔어야 할 피검사 수치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다. 호중구라는 백혈구 수치가 1000 이하면 항암을 잘해주지 않고, 500 이하면 무균실에 들어가야 하는 수치인데 아빠의 7차 항암 전 호중구 수치는 이후 피검사 결과지를 뽑아 확인해 보니 475였다. 그런데도 항암은 강행되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분명 교수님은 수치가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7차 항암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는 밤새 고통에 잠을 잘 수 없게 되었으며, 진통제를 마약성으로 바꾸고도 듣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항암이 끝나고 지난 9일 동안 아빠는 잘 먹지도 못했고, 잘 자지도 못했다. 고통이 아빠의 일상을 마비시켜 버렸다. 나는 아빠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복막에 퍼져있던 암이 그 사이에 다른 장기에 전이된 것은 아닌지, 위의 상복부에 침윤된 암이 더 커진 것은 아닌지, 아빠의 통증이 암성 통증인지 항암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아빠가 밥을 먹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음번 항암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항암을 쉬게 되면 암세포가 갑자기 퍼지게 될 것 같아 두려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이번 항암 중 시티를 찍게 된다는 것이었다. 얼른 시티를 찍어서 암이 확 줄어든 기적 같은 일을 맞이 하고 싶다가도, 혹여 암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거나 심지어 커졌을 때 아빠와 우리 가족에게 또 어떤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나도 두렵다.


지난 토요일에는 아빠 생신 파티를 했다. 세 자매와 남편들 그리고 세 손주들이 모두 모였다. 가랜드도 달고, 풍선도 달고 안 하던 짓을 했다. 아빠의 생일을 특별하게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인데,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그냥 평범하게 할 걸 그랬나. 아빠의 내년 생신도 축하해 드릴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엄습했다. 7살 두 명, 4살 한 명 손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같이 생일 모자를 쓰고 촛불을 먼저 불어 껐다.

토요일에 찍은 사진을 자매 카톡방에서 공유했다. "이 사진 아빠 귀엽지?"라고 둘째가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확대해서 아빠의 얼굴을 봤다. 귀여운 우리 아빠. 그런데 아빠의 얼굴이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늘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우리 아빠. 지나친 잔소리에 우리를 힘들게 했던 아빠. 세상 모든 일의 해답을 주었던 내 아빠.

우주만큼 커다란 내 아빠. 그런 아빠의 얼굴이 너무나도 아파 보였다. 


비가 온다. 나는 쉽게 잠이 들 수가 없다. 항암을 퇴짜 맞을 것 같아서 두렵고, 항암이 계속될수록 아빠 몸에 쌓여가는 독성이 두렵다. 이제까지의 피검사 수치를 둘째가 엑셀로 정리했다. 모든 면역력 관련 수치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모두 정상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아빠가 언제까지 그 독한 약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는 아빠가, 밤새 끙끙 앓고 마약성 진통제를 먹겠다고 할 정도면, 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언제까지 아빠가, 그 고통을 웃으며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도 발을 헛디뎌 넘어진 엄마의 까진 무릎을 걱정하고, 내 몸무게를 걱정하며 나에게 "너 그렇게 안 먹으면 뉴케어(밥을 잘 못 먹는 암환자들이 먹는 유동식) 먹인다"라고 하는 아빠. 차라리 아빠가 너무 힘들고 아프다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조금이라도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텐데. 아빠는 매일 물어도 매일 같은 대답이다. '응 괜찮아. 그렇지 뭐. 배가 조금 아프네, 온몸이 그냥 조금 괴롭네'


너무나도 두렵다. 의사들이 말한 여명이 실제가 될까 봐. 1년 동안 아빠가 항암제를 견디기만 하다가 우리 곁을 떠나게 될까 봐. 결국 아빠를 위한 인생을 1분도 살지 못하게 될까 봐. 그리고 그 이후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난 아빠 없이 살 수가 없다. 


아빠가 암환자가 된 이후, 모든 슬픔에 둔감해졌다. 또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도 둔감해졌다. 사랑하는 가족이 말기암 환자가 아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빠의 몸에 암세포들이 번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시간을 모두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충분히 많은 것을 해 봤다. 후회도 미련도 없다. 아빠에게 시간을 주고 싶다. 온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고 싶다. 은퇴를 하고 엄마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아빠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시간의 비가역성은 나를 한 없이 작아지게만 한다. 아빠를 위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을 공감하는 것도, 고통을 나누는 것도, 아무것도 나는 해줄 수가 없다. 


오늘도 수 없이 많은 카톡을 동생들과 주고받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열 번을 했을 거다. 오늘도 아빠는 점심을 못 드셨고, 어제 생일 파티에서도 엄마가 만든 팔아도 될 정도로 맛있는 갈비찜과 김치전과 미역국을 먹은 것은 우리들 뿐, 아빠는 단 한 숟가락도 드시지 못했다. 내가 만든 계란말이를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무셨다가. 도로 내려놓은 것이 다였다. 생신 파티를 준비한 것은 우리인데, 우리를 위해서 아빠가 파티를 해준 것 같았다. 음식 냄새가 전부 역할 텐데, 우리에게 계속 많이 먹으라고 웃으면서 말해주셨다.


아빠가 사라질까 봐 너무 무섭다. 5월 21일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현실인데 현실감이 전혀 없이 살고 있다. 어떤 날은 막 용기가 샘솟아서 아빠에게만은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았는데, 아빠가 먹지도 걷지도 않고 모든 수치가 바닥을 찍고 있는 요즘은,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다. 


차라리 내가, 암에 걸리는 편이 훨씬 이치에 맞는 일일 텐데. 나를 아끼는 모두에게 응석을 부리며, 엄살을 피우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의 역할을 잘 해냈을 텐데 우리 아빠는 그 역할마저 하지 않고 있다. 가족에게 전가해야 마땅할 불행과 우울과 슬픔과 고통마저, 불면의 밤으로 지켜내고 있다. 세상에 그런 아빠가 있을까 싶겠지만, 세상에 그런 아빠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아빠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아빠는 사랑을 온몸으로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우리 세 자매는 아빠를 사랑하는 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다니던 직장도 모두 그만뒀고, 아이를 돌보는 일 이외의 모든 일은 아빠를 사랑하는 일보다 후순위가 되었다. 그렇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도. 영원히 아빠가 우리에게 주었던 사랑에는 닿을 수 없겠지만, 암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좋은 것은 아빠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빠의 야윈 어깨, 항암으로 까맣게 변해버린 발, 잔디인형처럼 되어 버린 아빠의 머리카락, 전부 헐렁해져 버린 바지. 매일 배가 많이 나왔다고 놀렸었는데, 그 날이 다시 우리에게 올까. 아빠는 여러 개의 벨트 중에 하나만 줄였다. 다시 배가 나올지 모른다면서. 


아빠의 사진을 몇 번이고 본다. 아빠의 얼굴이 너무나도 슬프다. 

모든 나쁜 것은 나에게 오고, 모든 좋은 것은 아빠에게 가서, 예전의 날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 밤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내 슬픔과 내 사랑의 천만분의 일도 글로 쓸 수가 없다. 차라리 눈물을 쏟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니까.

지금 내리는 비처럼, 내 몸 안에 모든 수분을 쏟아 내고 나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은 그냥 울어야겠다. 

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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