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라 Sep 29. 2020

다시, 이팝나무 꽃잎이 필 때까지

무한한 우주, 시간의 비가역성 앞에서 

어려서부터 나는 걱정도 후회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의 대부분의 사념은, 앞으로 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로 점철되어 있었다. 가깝게는 그 날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한 말에 대한 후회로부터, 멀건 고등학교 문이과를 결정했어야 했던 때까지, 후회는 그렇게 나의 삶의 일부였다. 

후회는 곧장 "그때 내가 만약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즐거운 상상이기도 했다. 지금 아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문과 대신 이과를 택해서 정신과 의사가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고, 이미 외워둔 로또 번호로 로또 당첨이 된다거나, 개발되기 전이었던 땅을  사 두어서 부자가 되는 상상. 그런 상상들도 종종 해보았었다.


후회가 매일 밤 슬픔으로 밀려들었던 날들도 있었다.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20대의 전부였던 사랑을 떠나보내고 난 뒤, 스물몇 살의 나는 그 순간은 매일 후회했었다. 다시 그 사람과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의 진중하고 무거웠던 나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제 결코 다시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나서 나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후회했다. 그렇지만 추억은 힘이 없었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까. 나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상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내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달아서였을까.

그러나 좀 더 근원적인 변화는 내가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였다.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쌓인 이후로는 내가 아무리 상상해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이후로부터는 그런 무의미한 가정을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었다. 이제야 비로소 오롯이 현재를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0년 5월 21일 이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 텐데" 


시간을 돌리고 싶다. 아빠가 아프기 전으로 돌리고 싶다. 길게는 20 몇 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 철들기 전 내가 아빠에게 했던 잘못을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딸이 되고 싶고, 아빠에게 가족에 대한 희생 대신 아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라고 말해주고 싶고,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었는데도 아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아빠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믿었던 시간들을 돌려내서 내가 아빠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하나라도 더 고민하고 싶다. 


그것도 안된다면 딱 1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빠의 몸에 아직 암세포가 퍼지기 전으로. 

그것마저도 안된다면 아직 암세포가 췌장에만 머무를 때로라도, 그래서 아빠가 수술이라도 받아 볼 수 있게. 


시간을 돌리고 싶다. 


그러나 시간의 비가역성 앞에서, 우주의 질서와 인과율의 한계 안에서 나는 너무나도 무력할 뿐이다. 


2차 CT상에 변화가 전혀 없어 절망한 우리를 도리어 위로하며, 감기 주사 맞듯 항암을 계속할 거라고 일부러 힘찬 목소리로 말해주는 아빠. 내 절망이 걱정되어 두 번이나 괜찮다고 전화를 하는 아직도 내 걱정이 먼저인 우리 아빠.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의 가지를 찾아 내고야 마는 깊고 또 깊기만 한 마음을 가진 아빠. 

그런 아빠가 내 아빠라는 사실만큼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결정론적 우주관을 기반으로 시간에 대해서 우리의 순차적인 시간 흐름에 대한 인식과 다른 인식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외계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알게 되고, 언어를 체득함과 동시에 우리와는 다른 외계인들의 시간 흐름에 대한 관념까지도 습득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인식되는 그들의 인지 방법에 따르면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딸이 이른 죽음을 맞이해 자신이 얼마나 슬플지 잘 알면서도  애정 하는 놀란 감독의 최신작 테넷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시간을 역행하여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 그것이 현실(reality)"이기 때문에. 


나도 어쩌면 이제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와 아빠의 시간을 함께 허비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시간을 돌린다 해도, 또 같은 일이 생긴다면. 우주에 일들이 결정되어 있다면. 나는 순환하는 삶이라는 트램을 타고 달리는 방법밖에는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런 간절함이 닿아 기적이 내리는 곳에 우리가 있을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나의 시,나의 사랑, 나의 결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