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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Aug 28. 2020

다시, 이팝나무의 꽃이 필 때까지

진단, 그리고 진다...



#1. 진단. 그리고 진다.

거리를 뒤덮었던 이팝나무의 꽃들이 하나 둘 떨어지던 5월의 어느 날 오후 두 시 12분, 아빠는 말기암 환자가 되었다. 어버이날 모임이 2주 정도 지났던 때였던 것 같다. 그 날 모임에서 아빠가 유난히 수척해져 회사에서 직계가족은 건강검진이 제공되니 건강검진 예약을 하겠다고 했지만, 아빠는 매년 봄이면 입맛이 없었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성의 없는 말투로 ‘알았다. 아버지 3달 전에 건강검진 이미 받았어. 계속 이렇게 소화가 안된다면 그때 예약하자’라고 말했다. 아빠다웠다.  


5월의 그 날 저녁 아빠 집 주차장에서 우리 세 자매는 세상이 무너지는 걸 모두에게 알리려는 듯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심장에서 뜨거운 주먹이 요동치는 것 같았고 몸 안에 모든 수분이 눈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소리를 낼 힘도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빠 에게는 마스크를 끼고 있어도 주저함이 느껴졌던 젊은 의사가 말한 기대여명을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당신 인생의 남은 날이 몇 달 인지 처음 본 의사가 말해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나 자신에게 수없이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즈음 나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무거운 머리를 들기 힘들었고 밤 새 누가 온몸을 몽둥이로 때린 것처럼 아팠다. 매일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2년 넘게 먹고 있던 우울증 약과 수면제의 용량을 늘린 것도 그때쯤이었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회의와 매일 내게 주어지는 의무에 짓눌려 그 무엇도 기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착하고 햇살같이 고운 6살 아들이 나를 기쁘게 했었지만 순간의 행복이 나를 지탱해주지는 못했다. 1년 전 사두었던 학군 좋은 아파트는 몇 억이나 올랐고, 아빠의 권유로 한 번도 장래희망인 적 없었던 변호사가 되어 인정받고 있었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은 정말 내게 맞지 않는다는 절망감만 늘어가고 있었다. 책상에 쌓여있는 기록을 보면 한숨이 나왔고, 피해자들의 삶이 내게 전가될 때 나는 매일 시들어가고 있었다. 남의 인생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내 직업인 것 같았고, 직업적인 안정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통장에 돈이 입금될 때의 몇 분간의 즐거움이 다였다. 전체적으로 나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의 내가 타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사건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6살 아이의 우주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집안의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을 처리했다. 나는 이미 지급한 고지서처럼 아무렇게나 내 삶을 쌓아두고 있었다. 나는 의무와 완벽의 돌을 들고 있는 무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완벽히 지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것이 삶이구나. 이것이 내 인생의 결론이구나 이제 새로운 그 어떤 것도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겠다.’라는 사치의 우울로 엮은 이불을 덮고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깊은 우울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사치일 뿐이었다. 삶의 본질에 한 끝도 닿아 보지 못했던 미약한 자아의 사소한 발악일 뿐이었다는 것을 나는 곧 알게 되었다. 


며칠간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원망이 내 세계를 뒤덮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우리 아빠가 가장 나쁜 암이라는 췌장암 말기라는 사실을, 수술이 안되냐고 묻는 나에게 상복부 시티를 보여주면서 간의 하부 절반 이상이 암덩어리고, 위 쪽에 무수하게 있던 검은 동그라미가 모두 암이며, 췌장 미부에는 7센티가량의 암이 자라나고 있고 그 암이 비장을 완전히 먹어버렸고, 복강 내에도 암세포가 퍼져 있으니 1달 후에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 ‘간을 다 들어내고 살 수 있겠어요? 수술은 못합니다’라고 말하던 그 의사를 다시 찾아가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 뒤에는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저명한 의사가 쓴 책, 일본의 의사가 쓴 식이요법에 관한 책, 췌장암환자를 위한 가이드, 세상에 가이드라니 췌장암이 여행인가. 모든 것에 불만이 폭발했다. 그다음은 네이버에 있는 모든 암 관련 카페에 가입했다. 키워드는 당연히 췌장암이었다. 각종 수치가 의미하는 것부터 췌장암에 좋은 음식, 유명한 교수, 항암치료 칵테일 종류까지 나는 거의 반은 의사가 된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침에는 기적적으로 항암치료로 말기 췌장암에서 관해 진단을 받았다는 암을 이기자는 카페의 글에서 본 65세 남성의 사례가 우리 아빠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카카오톡 자매 채팅방에 공유했다가도, 저녁이 발목에 감기는 시간이 되면 아빠의 야윈 모습과 부어오른 다리를 떠올리며 정말 이대로 몇 달 후에 아빠가 떠나는 것이 아닌가 미친듯한 두려움에 오열했다. 내 세계는 출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내 인생은 아빠가 암환자가 되기 전과되기 후로 나뉘고 있었다. 진단받은 바로 전날에도 아빠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막내 동생의 아들의 하원을 도와줬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빠는 대학병원 외래를 보러 갔고 고열로 코로나 격리 병동에서 나와 함께 하루를 지새웠다. 격리된 병동에서도 ‘준현이 어린이집은 어떡하나. 소영이가 학교 강의가 안 끝났을 텐데’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평생 내가 보아온 아빠의 모습이었다. 새삼스럽지 않을 일이었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자기 몸도 잘 돌보지 못했으면서 무슨 손자 어린이집 하원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아빠가 원망스럽다가 미안함이 몸서리치듯 몰려왔다.  


그렇게 나는 암환우의 가족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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