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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Nov 13. 2022

사실, '문해력'은 진짜 문제가 아니야

매일 아침 끄적이기 - 17

1.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에 대한 댓글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2. '이지적이다'라고 학생에게 칭찬하니 '내가 쉬워 보이나?'라고 학생이 불만을 표출하더라.

3. '금일까지' = '금요일까지'

4. '사흘'='4일'  

5. '무료한 시간' = '무료 한 시간(무료 1시간)'

 

    '심심한 사과' '사흘'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날이 있었다.  뭔가 하면서 클릭한 기사에는 나도 직장에서 간혹 당황스러워했던 케이스들이 나와서 공감도 하고 나만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느끼며 안도하고 있었다. 89년생이라는 mz세대 중(솔직하게 얘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난 M이랑 Z는 같이 묶이면 안되는 세대라고 생각한다. 아마 Z세대도 우리같은 아재랑 묶이기 싫을 거다.) 가장 가운데 해에 태어난 나도 이렇게 가끔 20대들을 보며 당황스러울 때가 많은데, 나보다 윗세대가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움의 원인이 정말 '세대의 차이'라고 하기엔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요즘 애들은 정말 책을 안 읽어' 소리를 귀에 딱지 앉도록 많이 들었고, 우리의 윗세대들과 갈등을 많이 빚었다. 과연 이게 정말 세대차이일까?


  일단 먼저 나는 지금 이 '현상'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은 '문해력'이라고 했지만, 이건 내가 보기엔 단순히 '어휘력'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가 국어 이론에서 맨 처음에 배우는 언어의 특성 중 '역사성',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사라지고, 새로 생기고 변화한다.'라는 특성을 생각했을 때 자연스럽다. 언어는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하지 않던가. 나도 솔직히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글로 많이 접했지, 실제로 이 말을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기성세대 본인들도 요즘 쓰지 않는 말을 지금 젊은 세대가 모른다고 뭐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아쉬움을 조금 과하게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그러니까 이 겉면에 있는 '어휘력'이라는 껍데기를 치우고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자. 진짜 문제, 젊은 세대가 '꼰대질'이라고 댓글을 달던 '지적을 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태도'에서 출발을 해보자. 처음에는 나도 이게 그냥 단순히 세대갈등만으로 나온 문제라고 생각을 해봤다. 근데, 이 모든 상황이 나온 원인을 찾아가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심심한 사과'의 경우 한 콘텐츠 전문 카페가 올린 사과문에서 시작됐다. 그 관계에서 카페는 어쩌면 콘텐츠 '생산자'이고, 해당 댓글을 쓴 사람은 그 콘텐츠의 '소비자'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내 시간을 써서 뭘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내가 갑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았을까? 거기서 출발을 한다면 이 얘기는 단순히 세대차이 문제에서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 과연, 다른 상황에 있었다면 댓글 작성자는 저런 말을 했을까?


   내가 내 시간과 돈을 썼다고, 서비스 제공자에게 강하게 말할 '자격'이 생긴다는 생각, 우리가 생각하는 갑질과 매우 비슷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우리 청 민원실에서 아무 근거 없이 '검찰청 이 개새끼들 내 세금 먹고 니들이 하는 게 뭔데?' 하는 여러 악성 민원인들이 오버랩되면서 순간 아찔했다.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그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여러분도 서비스의 소비자라고 해서 상대에게 화내거나 호통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우리는 누군가에게 생산자가 되기도 한다.


   그 단어는 어려웠을 뿐이지 문맥에 맞게, 그리고 적합한 위치에 제대로 써진 문장이었다. '틀린 문장'이 아닌 제대로 쓰인 문장이 이렇게 크게 기사에 날 정도로 논란이 되었어야 했을까? 앞서 언급했던 '금일'='금요일' 사례, '이지적이다' 사례도 어떻게 보면 학교 역시 교육을 교육이 아니라 단순히 '서비스직'으로 생각하는 마인드에서 나온 갑질의 일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금일 케이스도 금일을 금요일로 알아들은 학생이 '학생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분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라는 문제제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앞서 말한 '지적을 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태도는 '자본주의/소비주의가 만들어낸 갑질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어떤 댓글을 봐도 어투가 중립적이지가 않다. 비꼬거나 매우 공격적이다. 어디 물건 컴플레인 거는 블랙 컨슈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떠오르지 않은가?


   또한 이 문제는 다들 세상이 각박해져서 생긴 마음의 비좁음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려는 마음인듯도하다. 사실, 이 심심한 사과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례가 솔직하게 내가 아는 그 단어가 이 단어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문맥상 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경우다. 설마 그 심심함이 그 심심함일까? 그런 생각이 한순간이라도 들었다면 사전을 들어서, 아니지 핸드폰으로 딱 '심심한'이라고 버튼 9번만 누르면 될 일이었다.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을 때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


   특정 단어, 모를 수 있다. 나도 여전히 글을 쓰면서, 그리고 여러 글을 읽으면서 이게 뭐지 싶은 단어들을 자주 만난다. 심지어 직장 특성상 법률용어를 볼 때마다 가끔은 미칠 거 같다. 그렇다고 내가 그 특정 단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면서 그런 단어를 쓰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앞서 말한 언어의 역사성, 그것은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언어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주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개입을 해서 나의 상황과 위치에 맞추지 않으면 당신은 틀렸다고 하는 못된 짓을 자주 한다. 굉장히 위험한 사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 이야기, 1984에 나오는 신조어 사전 이런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여러 이야기에서 이미 많이 보여줬다. 저런 논리라면 사투리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올까봐 무섭다.


   서로에게 조금만 마음을 열어주자. A라는 사람이 쓰는 언어와 B라는 사람이 쓰는 언어가 완전히 같다면, 안 그래도 지겨운 세상이 얼마나 지겨울까 생각해보자. 매번 다들 말로는 소통이 중요하다, 중요하다 하면서 막상 이런 이슈가 터지면 도대체 그 마음이 진심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아무리 기성세대에 대해서 많이 실망했고, 지금도 실망하고 있겠지만, 설마 기성세대가 자신의 아들 딸들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단어를 쓰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동생과 이 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다. 가르치는 과목이 국어이기에 더더욱 이 친구에게 놀림 반 순수한 궁금증 반으로 물었다. '도대체 애들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니?'


   이 친구의 대답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치와 아처법(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극성 부모가 만들어낸 환장의 콜라보'라고 대답했다. 그 뒤는 술기운 때문인지 두서는 없지만 한마디 한마디 한이 서린 넋두리가 들렸다. 요즘은 선생님도 그냥 서비스직일 뿐이라고. 교육감 선거 때마다 어정쩡하게 아이들이 아닌 표에 신경 쓴 교육정책, 의도는 좋으나 애매하게 만들어진 법과 극성 학부모가 만들어낸 교사 고소/고발 남용, 그로 인해 선생이라면, 스승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선생님들. 스승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목줄을 채우고, 맞벌이한다는 명목으로 스마트폰이라는 어마무시한 족쇄로 아이들이 오프라인으로 소통할 손발을 다 묶어놓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지 왜 우리한테 그러냐고, 요즘에 진심으로 대화하고 소통 가능한 애들이 몇이나 될 거 같냐고. 이제는 우리가 애들한테 책 좀 읽으라고 '부탁'/'애원'을 해야 하는데, 그래놓고 이제와서 애들 어휘력이, 문해력이 어떻느니 하는 문제가 안 터질 거라고 생각했냐고. 물론 뉴스에 나온 쓰레기같은 교사가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한데,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사람들의 생각은 아직도 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거 같다고. 술도 못하는 놈이 쓰린 소주를 들이키며 넋두리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괜한 폭탄을 건드린거 같아 미안해졌다.


  마지막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예전에 한oo 선생님(우리 둘 다 같은 학교를 나왔고, 둘 다 참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분 있다)처럼 해보는게 내 꿈이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하면 나 해임일걸?'라고 말하는 그 녀석 눈은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의 열정과 좋은 스승이 되겠다는 다짐에 찬 눈이라기보다는 매일 범죄자를 보는 나보다도 세상을 각박하고 회의적으로 보는 자의 눈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렇다, 어쩌면 기성세대는 우리가 만든(나는 이제 부모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자녀라고 보기에는 나이가 많은 나이지만) 결과물하고 마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힘내라고 했다. 네가 잘못 키우면, 걔네가 커서 우리 회사 고객 되니까 나 도와준다 생각하고 힘 좀 내달라고.


   교육의 흐름이 깨지면서 한 사회가 공통적으로 공유할 최소한의 것마저 깨진 것이 아닐까싶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는 그래도 제법 우리가 읽어야 한다는 책들이 있었고, 억지로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잠깐씩이기는 했지만 하다못해 pc방 가는 길이라든지, 학원에서 가끔 쉴 때라든지, 하다못해 같이 밥을 먹으면서라도 '얘기'를 했었다. 한번쯤은 그런 어려운 책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과정이 있었다.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소리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싶어도 일단 그래도 읽었던 그런 책들. 그나마 내가 어른들하고 얘기할 때 그나마 말할 수 있었던 그 주제들. 그것마저도 없이 이제는 각자 자기만의 스마트폰에 갇혀 있는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야 거기서부터 소통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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