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여자가 많아도, 안 생기는 자들을 위한 변호
"지민이 너는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니?" 명절이면 나오는 나의 단골 질문 중에 하나다. 다행히 우리 집안은 결혼에 대해서는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라고 하는 분위기기에, 이렇게 1절만 하고 끝나는 분위기지만 집안의 오랜 숙제 같았던 친척누나의 결혼으로 분산되었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그나마 보수적이신 할아버지는 한마디 덧붙이신다. 학교부터 회사까지 여자가 많은 환경인데 이상하다고. 매년 그랬듯, 묘한 압박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맞다. 나는 주변에 여성이 많은 환경에서 살아왔다. 중/고등학교 남여공학은 당연하거니와 간호학과, 유아교육과, 미대같이 대놓고 여자가 많은 과를 제외하고 여자가 제일 많다는 불문과와 영문과를 복수전공하였다. 지금은 남자들이 합격률이 낮아서 양성평등제를 시행하면서까지 남자 수를 늘리고 있는 직업 공무원, 그게 나다. 20대 혈기 왕성할 때 내 친구들은 나를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불렀다. 남들이 CC를 여러번 갈아탈 때, 딱 1번의 연애를 마지막으로 30대를 맞았기 때문이다. 많이들 묻는다. 어떻게 그 꽃밭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냐고. 여러명을 만나봐야 하는거 아니냐고.
심지어 어떤 공대놈은 술을 한바탕 마시고는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로 "햄 게이 아이가? 아니 어떻게 그렇게 들어오는 사람을 쳐내능교? 그럴꺼면 나랑 자리 바꾸자카이." 라고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환경, 그러니까 '풍요속의 빈곤'을 겪은 남자들은 나의 경험상, 그리고 내 주변의 경험상 결혼과 연애에 관해서는 오히려 서툴고, 잘 안 풀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늘은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은 사람들을 위한 변호를 해보고자 한다. 멀쩡한 그들이 왜 연애를 안/못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부모님들/친척들에게 아들들이 보내는 해명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같은 환경에 더해 나보다 더한 교대를 나온 내 동생의 데이터, 내 주변의 여초 환경을 많이 겪으며 자란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만 싹 뽑아봤다.
이건 성격이 깔끔하다는 뜻이 아니다. 내 방은 더러움의 화신이다. 내 동생은 내 방을 보고 같은 남자지만 이건 너무 심한거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한다. 내가 봐도 내가 심할 때가 있다. 근데, 신기하게도 우리같은 아들내미들의 특징은 '밖에서만큼은 세상 깔끔'하다는 것이다. 이게 뭐 형님들이 많이 말하는 '가시나같은 남자 느낌'이 아니다. 그런 가시나같은 남자 느낌이 나는 애들이 있기는 한데... 그게 되려면 본판이 좋아야 한다. 최소 '3초 박보검' 소리가 나올 정도면 그게 되긴한다.
아무튼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거의 우리가 살고 있는 여자가 많은 사회의 기본적인 생존전략 같은 거다. 우리가 그렇게 깔끔해지는 이유는 되게 단순하다. 깔끔하지 않으면 친구가 안 생긴다. 내 주변 절친이 여성이면 내가 그러고 다니는 꼴을 못 본다. 그런 친구가 한둘씩 생기면 나도 모르게 올리브영에 끌려가서 이것저것 사고 있는 자신을 보게되고, 그러다 보면 알아서 사람이 깔끔해지고 그렇게 안 다니면 뭔가 묘하게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깔끔하다고 무조건 그 사회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깔끔하지 않으면 그 사회에 진입 장벽 자체가 높아진다.
내 사촌동생은 여동생이지만 공대에 들어가면서 각종 게임을 섭렵했고, 특히나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만큼은 이 늙은 오빠를 한손으로 찍어누를 정도로 잘한다. 가끔 운동한다고 트레이닝복에 축구공까지 끼고 어딘가를 나가는거를 보다보면 참 듬직하다. 이렇듯 남자들이 좋아하는 취미를 공유하게 된 내 사촌동생처럼, 우리같은 아들내미들은 기본적으로 드라마와 로맨스 영화를 잘 본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친구따라 보게된 그 스토리를 보고, 그 감정선을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비슷한 감정선과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합쳐지기에, 우리같은 아들내미들은 친구들을 만나서 연애 얘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첫마디에 '맞아, 남자들이 좀 그런게 있긴 해. 너가 너무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된다. 여기에 더해서 심지어 더 나아가면, 남자의 입장이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솔루션이 나오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남들은 그게 뭐 감성적이니 공감능력이니 하는 거창한 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별거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결과물이 이거일 뿐이다.
이거에 더하여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남자들이 영 마뜩찮게 여기는 '갬성'도 탑재가 된다. 이게 뭐 인스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유명한 카페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올리는 것에 목숨을 건다는 말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과 국밥, 삼겹살에 소주 한 잔도 좋고, 브런치 카페에서 푸디 켜서 사진찍고 분위기를 즐기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시간을 떼우는 것도 싫지 않다는 뜻이다. 아침에는 남자애들끼리 모여서 농구 한 판 시원하게 때리고 점심에는 여자애들이랑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케이크 먹으면서 오늘 하루 얘기를 하는게 자연스러운 하루 일과인 사람들이 우리다. '이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라는 생각이 우리 뇌에는 없다. 있더라도 한 3초 뒤에 '에이, 재미있으면 됐지 뭐...'로 바뀐다.
앞서말한 친구의 "햄, 게이 아이가?" 발언을 하던 그때로 돌아가보자. 그 친구 눈에는 내가 어떤 친구와 계속 붙어 다니는 것이 이상해보였던 모양이다. 대학생이고, 교환학생으로 갈 때 지원금이 한정적이라 돈이 없는거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남자랑 여자가 비행기표를 싸게 구했다는 이유로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이 공항에서 노숙하면서 약 30시간을 같이 보내며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냐는 거가 그 친구 말의 요지였다.
우리는 모든 여성을 다 이성으로 보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도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사랑하고, 뭔가 매력을 느끼는 여성이 나타나면 매우 사람이 변하지만, 그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 내 주변의 모든 여자는 그냥 '사람'이고 나와 함께 이 미친 세상을 함께 헤쳐나가는 '친구'이다. 난 아직도 그때 나와 비행기를 같이 탔던 그 친구를 김'전우'라고 저장해놓고 있다. 내가 가장 가난했고 심적으로 전쟁같던 시절의 친구라는 뜻에서 이건 친구를 넘어선 무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 친구들 중에 남자들이 절대 다수인 사회에서 살아간 (남자)친구들은 여자와 대화를 할 때 무언가 '목적'이 있다. 약속을 잡거나, 무언가를 얻어내야 하는 대화를 한다. 우리들은 안 그렇다. 그냥 시시콜콜한 수다와 대화가 재미있고 서로 잘 통한다. 남자들이 피씨방에서 팀합이 잘 맞는다고 느끼는 그 비스무리한 감정과 즐거움을 우리는 여기서 얻는다. 이성과의 대화의 목적이 연애가 아닌 그냥 진짜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남자들, 그게 우리다.
이 사고방식과 습관이 우리같은 사람들이 연애를 안/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본다. 우리는 이 많은 대화를 통해 없던 센스가 생기고, 여자들이 말하는 '선'을 넘었는지 아닌지를 매우 빠른 시간에 알아챈다. 사랑의 맹점은 눈이 멀어버린다는 것이다. 근데, 이 습관은 '여자'로 보기전에 내 앞의 '사람'으로 한 사람을 보는 눈을 강제로 만들어준다. 나의 연애횟수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야말로 양적으로 너무 많은 여성을 만나버린 나머지 학습이 된 센스가 생겨버린다. 이게 선을 넘는거라는 위험 신호가 머리속에 울리기 시작하면 저 선을 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섣불리 이른바 '고백으로 혼내주기'는 절대 못한다. 우리 상남자 형님들께서는 패기가 없네 뭐라 해도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지 않은 인간들이다. 관계를 가까이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감하게 들이대기 보다는 우회로를 찾는 인간들이다.
또한 반대로 생각해서 나의 '선'을 넘어오는 여자들에게 '우린 친구잖아.'라는 사인을 줄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는 능력도 준다. 말로 표현 못할 그 감각이 생기다보니 나랑 안 맞을거 같은 사람,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에 대한 구분이 확실하다. 그렇다보니 의외로 '쟤는 뭔가 애가 부드럽고, 편하고, 만만하긴 한데... 막상 들이대보니까 철벽'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한다. 여지를 절대 남기지 않는 것. 이 또한 우리의 좋은 장점이자 관계를 너무 일찍 끊게 만드는 슬픈 단점이기도 하다.
쭉 듣다보면, 결국 앞서 말한 '계집애 같은 남자애'로 변한다는 거네 정도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여자의 경우 (여사친 많은 남자에게 데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면 더더욱) 우리가 여자가 편하고 잘 대화를 한다는 이유로 바람끼가 있다고 오해를 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대로 남자들은 우리가 여자를 잘 안다는 이유로 이상한 환상을 갖기도 했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근데,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 여자들이 '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반대로 연애의 가능성이 제로라는 뜻이다. 여초사회에서 오래 있던 남자일수록 애매하게 여지를 주지 않는다. 우리가 여지를 줬다면, 어떤 여자가 우리 앞에서 양머리 수건을 머리에 끼고, 생얼 상태에서 칫솔 입에 물고 "어 왔어? 잠깐 들어와 있어."를 자연스럽게 하겠나?
우리는 '오빠'가 아니라 '언니'다. 나는 어떤 녀석의 핸드폰에 내 이름이 '지민 언니'로 되어있거나 '마더 지민'으로 되어있던 것도 본 적이 있다. 이름도 중성적이니 썩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무언가 잘못 됐다고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 어떤 친구의 남자친구는 내 실물을 처음 보기 전까지는 당연히 여자인줄 알았다는 소리까지 했다. 집안 어른들을 포함한 우리 주변의 분들도 우리의 사정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실 꽃밭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사실 그 길이 비포장도로였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 비포장도로를 건너다보니 나온 결과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렇기에 우리가 여사친이 많다고 여친을 만들기 쉬운 것은 절대 아니며, 우리의 뒤에 늘 따라붙는 이상한 환상과 혐오는 조금만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