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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Jul 28. 2024

떠나지 않는 이유

매일 아침 끄적이기 -  14

내일의 일은 내일이 닥치기 전엔 모른다. 삶도 희망도 운명도 내일에 대해서는 딱히 대책이 없다. 단지 오늘의 순간순간들을 선택하고, 살아내며 내일을 기다려볼 뿐이다. 웹툰 <미생>에 이런 대사가 있다.

"장그래 씨,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질문 같아요? 간단해요. 선택의 순간들을 모아두면 그게 삶이고, 인생이 되는 거예요.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나, 그게 바로 삶의 질을 결정짓는 거 아니겠어요?"


오늘을 즐겨야 내일이 온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내일을 과감하게 처분해 배낭을 꾸려 여행길에 오른다. 오늘을 견디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의 홀가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견디고 있는 오늘의 성실이 옳은가를 고민한다. 즐기는 사람은 현실에 붙들린 소심하고, 옹색하고, 답답한 삶들을 연민한다. 견디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의 결단과 용기를 동경한다.


자유인, 방랑자, 순례자라는 이름표를 동경했던 시절이 있었다. 미디어가 과장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았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갔던 어지간한 도시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에게 꽤나 호의적인 동네였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동네는 미국 남부에 있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였다.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다녀왔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이 아닌 직접 살아본 해외 도시다. 대도시들을 몇 개 끼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와는 달리 유명한 도시도 없고 딱히 눈에 띄는 산업도 없었고, 뛰어난 관광지도 없고 해서 주 전체가 약간 조용하고 차분한 시골이라는 이미지가 아직 내 머리 안에 남아 있다. 주 기에서 알 수 있듯 야자수로 둘러싸인 덥고 습한 곳에 남북전쟁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옛스러운 저택, 교회, 마을 등이 어우러져 예전 미국의 모습을 간직하고 보여주고 있던 것이 퍽 인상 깊은 주였다.


교환학생으로 있는 동안 우연한 기회로 동아시아사 교수에게 한/중/일 관련 학습자료를 만드는 일을 도운 적이 있었고, 그 답례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늘 타지에서 고생하는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인지 그 분의 단란한 가족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해가 지고 열기가 조금은 식은 마당에서 마시멜로를 구우며 잡담을 했다. 동양 사람들은 정말 얼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느니, 중국 교환학생하고 한국 교환학생을 유심히 관찰을 하다보면 차이가 확실한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느니, 여기 사우스 케롤라이나가 다른건 몰라도 스윙댄스만큼은 어디 내놔도 안 밀린다느니 등등 역사학자답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그러다 그가 마시멜로를 나에게 넘기며 나를 비롯한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들 얘기를 하면서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예순 평생을 살면서 너희들처럼 바깥 세상에 대해 사실 그렇게까지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 사실 이 한 채의 집과 가족 이게 내 전부란다. 이제 애들도 결혼하고 손주들 보면...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이지. 자네와 자네의 용감한 친구들은(그는 가끔 나에게 이렇게 먼 곳으로 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라고 생각한다고 여러차례 말했었다. 늘 우리를 칭할 때 'brave'라는 말을 했었다.) 무엇을 찾아 이리 멀리까지 온 건가?"


무엇을 찾아 이리 멀리까지 온 건가... 그때는 이미 술에 살짝 취해있었고 깊은 생각을 풀어내기엔 내 영어실력이  미천해서 나는 '고여있는 삶이 싫어서'라는 말이 뭔지 영어로 한참 생각하다가 생각이 안 났고, 조금 길게 얘기했다. "그냥 하루하루 똑같은 삶을 버티는 것 보다는 어디든 일단 나가보고 싶어서요. 좀 밖으로 나가보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면 내 삶이 더 나아지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실 무엇을 찾으러 왔냐... 고 물으시면 사실 무엇이 무엇인지 알려고 찾아왔다고 답을 해야할까요?"


그 답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그는 나에게 가끔은 그 견디는 삶이 가지는 숭고함도 시간이 지나면 알 거라며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면 한국의 모든 지역을 손금보듯 환하게 알 수 있게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사실 자기가 이 나이 먹어 살아보니, 진부한 얘기지만 사실 지금 지민이 니가 찾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기(해외)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미소는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년처럼 순수하고 깨끗했다.


이제는 즐기는 자의 삶을 좀 벗어나보니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조금은 알 듯하다. 즐기는 자는, 떠나는 자는 알게 된다. 여행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터에서 오늘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임을. 내가 떠나온 그곳에 여기 이곳의 사람들, 삶들이 있었구나. 견디는 삶은 고이고 초라한 것이 아니라 사실 위대한 것이었구나. 정작 외롭고 가여운 것은 그 삶을 지루하다고 비웃던 삶에 대한 너무나도 이르고, 편협하고, 어린 단정이었구나.  


누구나 삶을 견디며 산다. 동정할 까닭도 값싼 위로를 건넬 이유도 없다. 오래 견디면 견디고 산다는 것을 잊게 된다. 견디는 삶도 오래 사랑하면 썩는게 아니라 숙성된다. 즐길만하다 싶은 삶이 된다. 사실 그렇게 바깥을 나돌아다닌 나의 어린 시절의 삶도 결국 반드시 무언가를 견뎌야 하지 않았나? 오늘의 자유든, 내일의 희망이든 모든 것은 무언가를 견딘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에 다른 방도는 없다. 견디든 즐기든 당면한 오늘을 살아갈 뿐.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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