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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Aug 18. 2024

Intro. 서른에는 애초에 잔치가 없었다

닿으며

내가 맞이한 서른은 혼란 그 자체였다. 서른은 뭐랄까, 어른이란 것이 조금 얕은 강같이 보여서 발을 내밀어 담가봤는데,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여서 까딱하면 빠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란 추는 나를 더 깊게, 더 깊게 붙잡았다. 당당하고 거침없이 건너야 하는데, 스무 살 때 보다는 손톱만큼 세상을 더 알아서 자꾸 움츠러들고 서성거리게 되었다. 어느새 물은 턱밑까지 차올랐고, 나는 죽지 않을 정도로 허우적거렸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징검다리가 놓인 곳이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물을만한 용기가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자신 없는 모습을 내보이기가 싫었다.


서른은 연습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숨을 곳은 없었다. '서러우니까 서른!'이라고 읊조리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날이 많았다. 사람과의 관계는 그중 제일 힘들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모르게 되었다. 도수를 잘못 맞춘 안경을 쓴 것처럼 사물도 현상도, 무엇보다 자신마저도 울렁거리게 보였다. 가끔은 현기증이 났다. 살아낸 만큼 살아질 거라는 착각은 자꾸만 나를 어긋나게 했다. 환절기 같아서 간간이 몸살 기운이 퍼졌다. 봄옷을 입고 있기에도 겨울옷을 꺼내기도 난감했다. 내가 그렸던 서른은 이런 것이 아니어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낯설고 불길했다.


조금은 행복해질 권리가 나에게도 있다고 믿었다. 열심히 살았으니까, 어느 정도의 수입이 갖고 싶었다. 보통의 일상을 꿈꿨다. 이 정도면 큰 욕심이 아니라고, 이 정도면 세상 너도 들어줄 만하지 않냐고 윽박도 질러봤다. 그런데 나아갈수록 물러나는 것 같았다. 고속으로 돌고 있는 트레드밀에 올라가 있는 기분이었다. 숨 가쁘게 앞으로 발을 내딛지만 몸은 자꾸 제자리, 혹은 조금 뒤로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행복이란 놈이 나만 따돌리는 것은 아닌가?


지금 뒤돌아 보면, 서른은 이런 시간이었다. 피아 식별이 안 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기에도, 실의에 빠지기에도 후회를 하기에도 너무나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할부와 대출로 얻은 것이 대부분이라서 확실한 내 것이 없는 세상, 사회든 직장이든 확실한 내 편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행복은 커녕 생활을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노동력A였다. 그것이 나의 서른이었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니 서른은 결코 자책할 것도 없었고 비난당할 것도 못 되었다. 그런데도 그 서른을 생각하면 여전히 막막하고 서럽다.


스무 살 때처럼 반항하고 아우성쳤어도 좋았고, 지금처럼 삶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냐고 애늙은이처럼 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서른이었으니 서툰 대로 실수를 해도 괜찮았을 것이고, 부딪히고 터져도 좋았을 것이고, 타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배낭하나 둘러메고 홀연히 떠나온 것처럼 그렇게 기약 없이 살아도 좋았을 것이다. 한 시인은 서른을 두고 잔치는 끝났다고 했지만, 애초에 서른에 환갑이나 칠순같은 잔치가 없었다.


그 서러운 서른이 지나고 조금 시간이 지난 지금, 내가 얻은 결론은 어떻게 살아도 나중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다 고만고만하고, 결국에는 '살아냈음'에 수렴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기우뚱기우뚱 하늘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오르는 수밖에 다른 이륙 방법은 없다.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단번에 날아오르는 서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에세이는 나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 기우뚱거리는 날개짓이며, 내가 만난 다른 삼십 대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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