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님과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회사 메신저에 다른 이름이었다면, 별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평소와 같은 업무연락인가 보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ooo'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살짝 고개를 꺾었다. '얘 뭐지?'
ooo과 나는 동기다. 으레 모든 회사에서 그렇듯, 아니 사람이 뭉치는 곳이면 그렇듯, 안 맞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 사람과 나는 그런 사이였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정말 시킨 일만 적당히 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게 나는 '뒷사람 힘들게 일만 늘리고 실속은 없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다. '시키는 것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게 어디냐?' 그래, 뭐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잠깐 그 사람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눈을 감고 혹시 본인 회사에 이런 멘트를 하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1. "이거 B팀 업무인데, A팀인 내가 왜 알아야 해?"
(아니... 이건 너도 관련이 있는 업무야.)
2. "오빠, 이거 어차피 여기까지만 하면 되는 건데, 왜 뭘 더 보려고 해?"
2-1. "뭐 이거 잘한다고 승진이 빨라지는 것도 아닌데, 이 시간에 7급 공부나 하고 있지 뭐하러..."
(그래, 네 말이 맞긴한데... 옆에서 힘 빼지 좀 마라. 네가 작은 청에서 혼자 있는 남자 막내 수사관의 어려움을 알아? 도와줄 거 아니면 좀 나가줄래?)
3. "아니, 아무튼 이거 나는 모르는 업무라니까? 난 못해."
(모르면 끝이야? 이거 니꺼라니까. 적어도 해결은 안 바라니까, 거들떠라도 봐라 좀...)
4. "아, 계장님. 그거는 A팀에서 해줘야 하는 일입니다."
(이야... A팀 업무 몰라도 된다면서, 이런 거는 또 귀신같이 알았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이었다. 잠결에 기억은 없었지만, 새벽 2시 반이 조금 넘는 어느 새벽이었을 것이다. "오빠 미안한데... 벌금유치자(많은 분들이 벌금은 안내도 수배가 안 걸린다고들 생각하는데, 아니다. 엄연히 형벌이고 수배가 걸린다.) 들어왔는데, 이거 어떻게 해?" 머리부터 피가 거꾸로 솟아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만약 피가 나왔다면 탁한 검은 피였을 것이다. 그래, 동기니까 도울 수는 있지. "주무계장님은 깨웠어?" "아니, 오빠 어차피 옆에 관사인데, 계장님 깨우기는 뭐해서..." 2차 분노가 왔다. "매뉴얼은? 지휘서 결재는 받았어?" "아니, 안 썼어. 잘 안 들어오는 업무고 벌금 업무니까 자세히 매뉴얼 안 봤지." 3차 분노와 함께 어이가 없어서 그 졸린 와중에 헛웃음을 친 기억이 있다. '그래 주간에는 내 업무 맞는데, 밤에는 그거 하라고 너를, 당직자를 세우는 거야. 이렇게 전화할 거면 넌 거기 왜 앉아 있냐? 선배들도 이 시간에는 매뉴얼보고 일처리하시지 나한테 전화 안 한다!!!!'라는 말이 목구멍 안까지 돌았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3번 멘트를 뱉으며 드러누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렇게 크게 유감은 없었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작은 청 남자 수사관들의 숙명 같은 것이다. 가끔 선배들도 전화하기는 하니까.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보통은 다음날 내 위에 고생했다고 올라와 있던 음료수 대신 그날은 무언가 싸한 분위기만이 내 주변에 돌았다. 밤에는 전화 좀 자제해 달라는 한마디가 도마 위에 올랐다. 나의 죄명은... 굳이 따지면, '소심죄'였다. 대부분의 내용은 '남자 새끼가 쩨쩨하게... 그거 가지고 정색을 하냐?'였다. 도대체 말을 어떻게 옮겼길래, 새벽 2시쯤에 생겼던 일이 출근 한 시간 만에 사람 하나를 난도질을 했다. 나는 통영이라는 도시는 사랑했지만, 통영을 나온 이유 중에는 이것도 있다. 뭐 당연하지만, 경상도 사람인 그 사람과 강원도 사람인 나에 대한 일방적인 차별. 청에 하나밖에 없는 막내 남자 수사관에게 은근히 밀려오는 이상한 잔업들. 적어도 근무 시간 외에 일을 했으면 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이런 1년이 나의 2019년이었다. 누군가는 동기사랑이 나라사랑이라고 했고, 결국 남는 건 동기뿐이라고 선배들은 말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에게 그 동기는 악몽이었고, 재앙이었다. 통영 바다가 나의 친구였고, 나의 부모였다. 그마저도 없는 삭막한 도시가 내가 보는 풍경이었으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난 지금도 후배들이 동기간의 마찰이 있을 때 어떻게 하냐고 물을 때, 정 못 참겠다 싶으면 너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도 된다고 한다. 사실 참는 것만이 정답이 아닐 때가 있는 법이니까.
우리는 어떤 대화도, 어떤 사과도, 어떤 용서도 없이 흘러갔고 2022년 10월이 되었다. 3년 동안 연락 하나 없던 그 동기가, 아니 그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 처음에는 안부를 물었다. 내가 미리 이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아는 상황에서 본론을 말하지 않고 빙빙 안부부터 묻고, 간간이 소식은 들었다느니, 서울 생활은 어떻냐느니 등등을 묻는 메신을 보고 있는데 솔직히 좀 강하게 표현해서 속이 메스꺼웠다. 역겨웠다. 차라리 본인답게 먼저 결혼 얘기를 꺼냈으면 차라리 덜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자기 결혼식이라고 이제서야? 의도가 너무 빤했다. 나도 참 많이 사회에 찌들었구나, 화도 안 내고 묵묵히 티 안 내고 메신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튼, 오빠 저 결혼해요. 오지는 못하더라도, 축하는 해줘요. 뭐 우리 많은 일이 있었지만, 뒤끝은 없죠?"
뒤끝이라... 뒤끝은 없지 없어. 이미 난 2019년의 막내가 아니니까. 3년 동안 나도 놀고먹고만 있지는 않았으니까. 하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음 쓰지 마, 어차피 다 지난 일이지. 그때도 이해는 한다고 했고, 지금도 이해해. 과거에 미안해할 필요 없어. 각자 이제 가는 길 가는 거지. 축하한다." 이 정도면 뭐, 충분히 그 사람이 마음이 편할 '뒤끝 없는' 답변이 되었을 거 같았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차라리 우리가 서로 다른 청으로 찢어지는 2020년에 이렇게 말을 걸어줬어야지, 그때 풀었어야지, 적어도 내가 간 후에 내 험담은 하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흘러가게 두든지. 지금 내가 '뒤끝'이 있는 거는 잘 모르겠는데, 네가 '뒷북'을 치고 있는 거는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