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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Aug 25. 2024

2. 점심시간 1시간을 위한 생각

   작은 청에서 큰 청로 옮기면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나에겐 점심시간이었다. 모든 직장인에게 점심시간 계획은 오전 일과가 아무리 바빠도 놓치지 말아야 할 업무보다 더 중요한 과제다. 작은 청의 경우, 어차피 같이 먹을 사람이 정해져 있기에 메뉴를 제외하고는 솔직히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없었다. 심지어 지방의 경우 자주 가는 맛집의 수 자체가 한정적이다. 그러나 직원 수가 많아도 너무 많은 큰 청은 '무엇'을 먹을지만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먹을지, '누구'와 먹을지까지 정해놔야 하는데, 여기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 '누구'와 먹을지를 정하는 일이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은 미리미리 점심 계획을 잘 세워놓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은근 낯도 많이 가리니, 원래 친한 동료들, 서울에 와서 연수원 이후 엄청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 이번에 새로 만난 팀원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밥을 먹지 않았다. 대부분 그래서 나의 점심은 혼밥일 때가 많았다.


   문제는 그런 생활이 몇 달이 지났을 때부터 시작됐다. '혼밥'자체에서 오는 어색함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적응할만한 외로움과 어색함이었다. 진짜 문제는 '혼밥을 먹는 나'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청에서 온 나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무슨 도시괴담 마냥  무언가... '이 친구는 일은 참 꼼꼼하게 잘하는데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친구인 것 같다', '다가가기 힘들다',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나 없는 유령 같은 애다' 등등 나에 대한 여러 가지 어두운 이야기가 퍼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국 나는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점심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의 전략은 11시쯤 아무리 점심약속을 잘 잡아도 파투라는 천재지변은 늘 나오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점심전쟁 낙오자들의 피난처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정말 반가운 동료면 당연히 기분이 좋고, 때로는 썩 같이 먹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와서 고민할 때도 있다. 밥 먹는 내내 자기 얘기만 주구장창 하는 사람, 끊임없이 회사 내 이 놈 저 놈 거리며 욕하는 사람, 나는 관심이 하나도 없는데 자기만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혼자 웃는 사람,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처음 본 사람임에도 그냥 이유 없이 내가 안 좋아하는 사람.


   그렇다고 "아무리 내가 점심약속이 없어도, 차라리 혼자서 먹고 말지 너랑은 먹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 그런 경우 다음 단계 선택으로 넘어간다. 좁디좁은 공무원 네트워크를 고려해(실질적으로 같은 고검 산하에 있는 사람들은 싫어도 돌다 돌다 보면 한번 정도는 다시 보게 된다.) 그냥 얼른 가서 먹고 올 것인가, 아니면 무엇보다 소중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빠질 것인가. 여기서 더 복잡한 선택은 당연히 후자인데, 보통 이렇게 약속을 깨면 11시는 물론이요 11시 반도 넘을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새 약속을 못 잡고 혼밥으로 가는 경우가 99%이고, 그렇게 혼밥을 하다가 '그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하면...?'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밥 먹는 시간에도 마음이 불안하다. 싫어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나보다 기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체할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다가 최근 어떤 후배로부터 매우 똑똑한 해결책을 듣게 되었다. 서로 함께 밥을 먹어주는 팀의 얘기인데, 이 팀의 목적은 팀원들끼리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팀원 중 누군가가 함께 먹기 싫은 회사 선배와 밥을 먹을 때, 함께 나가서 먹어주며 고통을 분담해 주는 것이다. 겉으로는 기발하다면서 많이 웃었지만, 솔직히 뜨끔했다. 그렇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5년 차다. 곧 11월이면 만 5년이 차고, 어느새 내 뒤에는 후배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내가 점심을 사준 후배들 중에 이런 후배들이 한 명도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후배들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밥을 먹고 싶지 않은 선배(난가?)는 사정도 모르고 그저 밥 사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 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점심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못해서 마지못해 가던 밥자리, 의무감에 자리만 채웠던 밥자리들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내가 밥 약속을 제안하는 숫자도 비약적으로 줄였다. 더 이상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온 뒤의 공허함과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가며 에너지를 쏟은 뒤 의자에 앉았을 때의 피곤함이 나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지만 결코 처음과 같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나만의 시간에 이제는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비록 겨우 한 시간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나에게 이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책을 보거나, 책이 싫으면 의자를 뒤로 젖히고 낮잠을 청했다. 오, 신박한 경험이었다. 이 좋은 거를 왜 안 하고 굳이 그 전쟁터를 헤맸던 걸까? 여전히 남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수군거리겠지만, 뭐 어떤가? 그 쓸데없는 고민과 즐겁지 않은 자리에서 오는 고단함을 줄이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또한 예상치 못한 부수입도 있었다. 약속도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니, 다이어트랑 비슷한 효과가 나왔다. 마음이 가볍고, 좋은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의 식사자리는 오히려 많아졌다. 조금 과장을 붙여보자면 삶이 풍요로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도 불시에 공격해 오는 윗분들의 밥 약속, 술 약속을 다 내키지 않는다고 피해다니지는 못한다. 어쨌든 우리는 회사에 다니고(그것도 조금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 집단임을 늘 잊지 않으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해야만 한다. 팀워크를 위해 가끔은 뻔히 욕을 조금은 먹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의무감에 식사자리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래도 늘 하나는 확실히 하고자 한다. 최소한 후배들이 '팀'을 짜서 나올 필요가 없는 자리를 만드는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부르지 말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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