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잘해야 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 정말로 잘해야 하는 일이 사람을 받아들이고, 보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받아들이는 일을 두려워하면 외로워지고, 보내는 일에 서툴면 괴로워진다. 이 두 가지 일은 인과관계여서 참 어렵다. 받아들일 때 신중하고 내보낼 때 과감하면 참 좋을텐데, 늘 반대로 해서 인간관계가 피곤해지기 일쑤다. 몇 차례 겪어봤으면 쉬워져야 할 텐데, 이별에 있어서는 여전히 참 서툴다.
얼마 전에 발라드 가수들이 유튜브에 나와서 하던 이야기 중에 귀에 확 꽂힌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예전의 이별방식과 현재의 이별방식이 너무 달라서 어지간히 좋은 노래가 아니면 발라드가 히트하기가 힘들어 보인다는 말. 예전에 이별은 거의 '사별'에 가까웠고, 지금의 이별은 헤어져도 sns나 다른 여러 통로로 그 사람이 보여서 완전히 끊기지는 않으며, 심지어 만나고 헤어짐마저도 너무 빠른 시대가 되어서 이별이 예전 이별과는 조금 다른듯하다고.
20세기의 이별은 확실히 그랬다. 그때의 이별 풍경은 볼만했다. 우는 것은 기본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고, 모든 감정을 게워내고 난 뒤에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이 투명하게 보일 때까지 슬퍼했다. 그게 하나의 유행이었다. 사랑이 끝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던 세기였으니까. 이별을 대하는 나의 자세 같은 것. 애도라는 것이 떠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벌이는 '제의'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확실히 지금과는 다르긴 하다.
형태가 바뀌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혼자가 된다는 건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근데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도 곁에 없을 때도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잠시 혼자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을 뿐이다. 나 혼자라는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시리고 쓰라리다. 이 쓰라린 통증이 스물에도, 서른에도, 마흔에도, 죽는 순간에도 찾아온다. 앞으로 겪어야 할 이별이 아직도 우리에게 한참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이별에 정답이 있을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만났기에 헤어짐도 자연스러운 것이 이별의 가장 이상적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별은 삶이 맞닥뜨린 격변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 중에 하나다. 만남도 이별도 순환열차처럼 관계의 궤도를 돌뿐이다.
우리 집을 포함한 모든 농가는 늘 비워두는 땅이 한 군데는 있다. 휴경지. 왜 아까운 땅을 묵혀두냐는 사람들은 하수다. 휴경기를 가진 땅이 더 풍성하고 알찬 곡식을 맺는다. 사람의 이별이란 것도 일생의 궤적으로 보면 잠시 맞이한 휴경지같은 기간일 뿐이다.
앞선 얘기로 돌아가보자. 20세기의 이별, 그 지독한 감정을 쏟아낼 시간이, 그 이별이 왜 그랬는지 생각할 시간을 빼앗긴 시대인듯하다. 이별을 생각하기 전에 전 애인의 sns가 보이는 시대. 이별을 애도하기도 전에 다른 것에 신경이 분산되는 시대에 이별만큼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 없으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별을 감정적으로 손해보는 행위로 생각한다. 이별엔 정답이 없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기에서 파생되는 감정을 다루는 방법에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막대한 감정을 투자하는 만큼 획득하는 무언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이별이 주는 무언가를 피하려고만 한다ㅡ 그렇다면 그 감정은 낭비인가?
생은 우리를 관통해 지나간다. 이별의 시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 통증의 시간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른 때보다 더욱 선명하고 치열하게 많은 것들을 알게 한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우리가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더 자주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