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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0. 2023

사랑을 말할 때 필요한 것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최근에 한 독서모임에 나갔다. 독서모임을 리드해주시는 분이 무척 섬세하고 친절한 분이었다. 어쩌다 리더님에게, '언제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문득,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라고 답했다. 리더님은 낭만적이네요, 라고 말씀하셨고, 왠지 겸연쩍어져서 조금 웃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고 있구나, 이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구나, 라고 느낀 때는, 어느 봄날 새벽, 잠에서 깼을 때였다.


그 무렵 한 권의 소설을 읽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당시 나는 한 대학의 도서관에서 늦깎이 취업을 위한 시험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아는 대학원생 친구에게 학생증을 빌려 도둑공부를 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이제 와서 미안하다...)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해야 하는 공부는 열심히 않고 소설을 읽고 있었다. 정말 한심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그때 읽은 <희랍어 시간>은, 마치 마음을 깨우는 종 같았다. 


<희랍어 시간>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그 다음으로는 아이마저 이혼한 남편에게 빼앗기고 혼자 남은 여자가 있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잃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오래 살다가 가족과 떨어져 한국으로 온 남자가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눈이 나빠,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의 직업은 고대 희랍어 강사. 희랍어 수업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여자를 보며, 그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상한다. 이 소설은, 말과 글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 무척 서툴다.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말과 글에 유난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그런 내 둔감함 또는 소심함 때문일 것이다.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결단하는 법이 없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서툴기 때문이다. 잘 다듬어진 글과 말로 혼자 정리를 해봐야만 그나마 알아차린다. 그 정도로,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고도, 이게 호감인지 아닌지 오래 고민했다. 그 애에 대해서도 그랬다.


당시 나는 그 애에게 자꾸만 눈과 귀를 빼앗겼다. 그 애의 섬세한 손가락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그 애의 동그란 안경테, 그 애의 목선, 오종종한 코와 입술, 그런 것들이 자꾸만 보고 싶었다.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그 애의 목소리가 자꾸 듣고 싶었다. 그 애의 목소리로 그 애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동경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었다. 함부로 판단 내릴 수 없었다. 


내가 그 애에게 마음을 주고 싶어도, 그 애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이 마음은 버려야 한다. 가수 윤상은 자신의 노래 '사랑이란'에서 사랑을, '함께 숨쉬는 자유'라고 말했다. 나와 그 애가 함께 숨쉬는 자유를 누리려면, 내가 그 애와 함께 숨쉬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 애 또한 나와 함께 숨쉬고 싶어야 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마음을 온전히 주어도 되는지, 이 마음이 정말 그 애에게 닿아도 괜찮은 것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잠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애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이따금 그 애와 가까이 다가앉을 때면, 안경 너머 그 애의 눈이 유난히 새카만 것이 보였다. 동공이 보이지 않도록 새카맸다. 눈이 너무 새카매서, 이따금 두려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데, 눈을 보면 마음이 보인다던데, 아무리 눈을 보아도 그 애의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 눈 안에 정말 내가 들어있나, 궁금했다. 


어느 봄, 새벽, 문득 잠에서 깼다. 꿈에 그 애가 나왔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기억인데, 아마 별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테다. 그저 그 애가 나왔다는 것만 기억난다. 꿈에서 깨고 조금 울었다. 미지근한 눈물이 뺨을 지나 귓속으로 스미는 것을 느끼며, 깨달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구나. 이 마음을 이제야 알겠구나.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가 없구나.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 부풀고 부푼 마음이 둥실 떠서, 창밖으로 날아서, 그 애에게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젖은 눈을 해서는 조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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