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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0. 2023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

누군가 또는 무언가의 덕후가 되어가기까지

나는 덕후다. 사실 '오타쿠'는 우리말이 아니라 순화해야 하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덕후'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무엇의 덕후냐면, 그건 또 확실하지 않다. 그냥 덕후다. 그런데 또 이쯤 되니, 스스로 덕후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덕심을 쌓고 있는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덕심만만의 상태란, 그리 도달하기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덕후는 그 분야에 어느 수준은 통달해 있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커피덕후다. 우리나라에 카페가 얼마나 많으며, 커피 소비량은 얼마나 많은데, 커피 전문가는 또 얼마나 많은데. 그럼에도 나는 커피덕후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일단 커피를 잘 먹고 많이 먹는다. 심지어 수면장애와 만성위염을 앓고 있음에도 커피를 끊지를 못한다. 의사선생님의 커피 끊으라는 주문에, '술도 담배도 마약도 안 하는데 커피까지 안 하면 삶에 무슨 낙이 있나요?'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좋아하는 커피의 종류도 뚜렷한 편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보다는 핸드드립 커피를 선호한다. 프렌치프레스보다는 융드립이 더 좋다. 원두는 산미가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을, 약배전보다는 중배전 이상을, 동남아시아보다는 아프리카나 중남미 쪽을 선호하는 편인 것 같다. 그렇다고 꼭 특정한 브랜드나 국가의 원두, 추출방식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맥모골(맥심모카골드) 노랑이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친구니까. 자판기 커피도 가끔 마시면 정말 맛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림덕후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보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다. 북리뷰를 목적으로 만든 네이버 블로그에 전시 감상 관련 카테고리를 따로 마련했을 정도로 좋아한다. 내가 다닌 대학은 미술대학이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미술 관련 전공을 복수전공하는 동기나 선후배들도 많았다. 도서관에 미술 관련 서적도 많았고, 학부생 전시회도 종종 열려서 가볼 기회가 많았다. 서울 시내, 특히 종로의 갤러리들과 각종 국·시립 미술관을 다닌 것도 그 무렵부터다.


그때 도서관에서 한창 읽은 것들이 진중권과 오주석, 유홍준, 최순우 같은 사람들의 책이다. 특히 진중권은 내가 난해하다고만 생각했던 현대 서양미술을 감상하는 데에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어떤 작품을 보고 왜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인간이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미감을 찾아내는지를, 나는 그의 책들-<미학 오디세이>, <교수대 위의 까치>, <앙겔루스 노부스> 같은-로부터 배웠다. 오주석과 유홍준, 최순우는 내게 우리나라 전통미학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 사람들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리 아프도록 돌아다니며 도자기와 옛 그림들을 보았다.


최근 4~5년간은 달리기덕후였다. 2018년 봄, 그러니까 내가 늦깎이로 겨우 정규직으로 입사해서 신입사원 티를 팍팍 내고 있을 때, 임금은 쥐꼬리만 하던 때(물론 지금도 쥐꼬리이긴 한데 그때에 비하면 통통한 쥐꼬리다), 돈이 없어 무작정 길로 나가 런데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의 지시에 따라 뛰기 시작한 게 처음이었다. 8주만에 30분 달리기를 성공하고 나서, 4km 완주하면 메달을 주는 소규모 대회를 나갔다. 거기서, 지금은 러닝 전도사로 유명해진 안정은 씨를 처음 보았다. 달리기를 하면 저렇게 반짝거리는 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지금은 총 4개의 러닝크루에 가입해 주에 적어도 3일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뛰는 사람이 되었다. 마라톤대회 완주메달이 너무 많고 무거워, 보관해둔 2층짜리 장의 나무바닥이 가끔 푹푹 주저앉는다. 마라톤대회에서 받은 티셔츠들이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이라, 이제는 화려한 색의 옷은 엄마도 주고, 낡아지면 버리기도 한다. 집에서 잠옷으로도 입는다. 운동용 티셔츠를 사 입을 일이 없다. 대신 러닝화는 엄청 사제낀다. 가끔 엄마 몰래 사기도 한다...(가격을 속일 때도 있다...)


물론 덕후라고 해서 모든 것에 통달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노트에는 둔감하다. 꽃향이나 풀향은 그래도 가늠이 되는데, 베리류의 산미와 오렌지의 산미가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른다. 현대미술을 좋아한다지만, 그건 한국의 1970년대 추상화, 그 중에서도 김환기나 유영국, 박서보 같은 유명한 작가들에 한정된 거고, 그것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서구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깜깜하다. 더구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면(흔히 우리가 난해하다고 말하는 정말 최신의 미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여러 책을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달리기, 말해 무엇하랴. 4년을 넘게 뛰었지만 여태 풀코스 마라톤 완주 한 번을 못 해봤다. 10km 기록도 5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써놓고 보니 내가 덕후가 맞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굉장히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정말 커피덕후라면 눈 감고 커피 마셨을 때 이게 에티오피아인지 케냐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 같고, 현대미술을 좋아한다면 다다이즘에서 네오다다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쯤은 알아야 할 것 같고, 달리기덕후라면 풀코스 마라톤은 4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이들 중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내가 덕후라고 믿는다. 왜냐면,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할 때, 진심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 아침, 나는 달리기를 하러 간다. 사람들과 모여 신나게 달리기를 하고 마시는 커피가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날이 더우면 아이스커피를 가장 큰 사이즈로 시켜서 벌컥벌컥 마시는데, 그때 입술 피부점막을 거쳐 식도를 타고 내려와 온 내장으로 파고드는 카페인의 아릿한 느낌이 정말 중독적이다. 그 맛을 못 잊어서, 일요일인데도 평소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하러 간다. 땀을 실컷 빼고 마셔야 더 맛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공중화장실 가서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갈아신고 전시를 보러 간다.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추어 간다.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기 때문에 전시장에 사람이 그나마 드물다. 달리기를 하고, 커피로만 속을 대충 채운 채, 퉁퉁 부은 발을 해서는 갤러리들을 돌아다니며 그림이며 조각을 정신없이 본다. 액자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가 멀어졌다가, 오른편으로 갔다가 왼편으로 갔다가, 조각상 앞에서 쭈그려앉았다가 까치발을 들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 하나 싶을 것이다. 삼청동이나 이태원의 경우 갤러리들이 밀집해 있어 하루에 서너 군데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너댓 시간이 훌쩍 가 있다.


밥도 굶고 무릎관절을 상해가며 그러고 있는 이유를,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냥 좋아서, 이게 다다. 일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하고 못 하면서, 좋아하는 건 밥도 굶고 잠도 설쳐가며 좋아한다. 돈이 되나 쌀이 나오나. 심지어 돈을 써가며 한다. 정말 잘하는 짓이다. 엄마는 내가 무릎과 발목을 상해 정형외과 치료를 받으며 달리기에 몰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동생은 나더러 도파민 중독이 아닌지 진심으로 의심해 보라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이 마음. 그저 좋아서,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너무 좋아서.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사소한 기쁨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일을 잘해서, 좋아하는 게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다. 우울함에 잠을 설치면, 새벽같이 달리러 나가면 된다. 입맛을 잃어 기운이 없을 땐, 억지로라도 밥을 먹고 근사한 향과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신다. 아름다운 것들이 보고 싶으면 전시장을 찾는다. 고요한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그림과 조각을 본다. 나와 아주 먼 곳에 있지만,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작가-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보면 마음에 물처럼 사랑과 기쁨이 차오른다. 행복해진다.


사실 평생, 나는 스스로를 못나다 생각하며 살았다. 이렇다 할 뭔가를 이뤄놓은 게 적거나 없어서인지. 멋진 연인이 있는 것도, 수입이 많은 직장에 다니며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외모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그럼에도 이 독한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나마 그럴 수 있었던 건, 역시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일을 잘해서인 것 같다. 삶 이곳저곳에서 사소한 기쁨거리를 잘 찾아내서인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이, 남은 생에서의 목표다.


앞으로도 나는 덕심만만하게 살 것이다. 주변에 트레일러닝에 열심인 지인들이 많아서인지, 요새는 자꾸 등산에 관심이 생긴다. 일단 등산화와 등산스틱을 사놨다. 등산배낭은 집에 있던 것을 쓰면 되고, 다행히 달리기를 하면서 운동복은 정말 물리도록 많이 갖췄다. 올해 안에 제로포인트트레일 서울 피크5라는 프로그램을 완주하는 게 목표인데, 아직 한 곳도 가보질 못했다. 아직까지 달리기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비오는 날 달리기의 참재미도 알아버려서, 이제 장마철이 두렵지가 않다. 정말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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