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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0. 2019

1.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어?

드라마작가라는 환상과 실제

A.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은 당신.

어려서부터 책 깨나 읽고 글 깨나 썼다.

학창시절엔 교내 글짓기 대회 석권은 당연, 시도 단위 백일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학교 이름을 빛냈다.

장래희망은 늘 ‘작가’였다. 글을 써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고, 독자들을 웃기고 울리고 싶었다.

살면서 겪어온 인간군상을, 사회의 부조리를 기록하는 시대의 증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누가 봐줘야 웃기고 울리고 증인도 되지... 안 팔리는 시나 소설보다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TV드라마를 써보는 건 어떨까 싶다.    


B.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은 당신.

어려서부터 TV를 좋아했고 드라마에 환장했다.

안 되는 성대모사로 명대사들을 따라했고,

촬영 장소에 찾아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감상에 젖기도 했다.

엔딩이 마음에 안 들면 자기 나름의 번외편을 써보기도 했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을 때,

수많은 제작진들 중에 가장 빛나 보이는 이름은 작가였다.

영화는 감독의,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하지 않나.

그동안 봐온 드라마들만 수십 수백 편인데, 나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지 않을까.

저런 건 어떻게 편성됐을까 싶었던 시시한 드라마들보다는, 훨씬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C.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은 당신.

TV 연기대상 시상식의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 배우들이

자신을 간택해주고 매력을 재발견해준 ‘작가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이미 작가 스스로 스타가 된 케이스도 있다.

회당 고료가 몇 천만 원이다, 어디에 빌딩을 샀다, 소문도 기사도 연예인 못지않게 화려하다.  

천재나 장인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도 있다.

배우보다 작가 이름을 보고 드라마를 선택한다는 시청자들,

작가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뛰어난 필력을 칭송하는 팬들을 보면,

드라마작가도 어느 예술가 못지 않게 위대해 보인다.

일할 땐 치열하게 몰두하다가, 작품이 끝나면 훌훌 털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면...

정말 이보다 더 멋진 직업이 또 있을까 싶다...      




거칠게 표현해 봤지만, 대부분의 작가지망생들이 한번 쯤은 이런 마음들을 품어 봤을 거다.

나 또한 저 많은 속셈들을 가슴 가득 안고 지망생 시절을 보냈다.    


어느 작가의 특강에서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드라마를 하려는 사람들은 돈도 명예도 포기하지 못한 이들이란다.

실리와 이상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아하는 욕심쟁이라는 거다.

자기표현 욕구는 있는데 시인이나 독립영화 감독이 되자니 윤택한 생활을 포기해야 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 직장인이 되자니 그건 또 너무 멋없고 삭막한 삶일 것 같을 때,

이 욕심쟁이들의 머릿속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직업이 바로, 드라마작가나 PD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김은숙이나 김은희, 백미경이나 이수연 작가처럼 되고 싶다.

그런데 되고 싶다고 다 될 수 있나?

한 번 더 솔직해지자.

돈과 명예를 거머쥔 드라마작가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선 1% 뿐이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이제 막 단막극으로 데뷔했을 때 한 친구로부터,

대학 졸업반인 자기 동생이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다는데, 전화로라도 상담을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도 생짜 신인이라 아는 게 별로 없지만...’으로 수줍게 시작된 친구 동생과의 통화는,

‘웬만하면 안정적인 직업을 먼저 찾은 다음 부업이나 취미 같은 마음으로...’라는

꼰대 같은 멘트로 마무리됐다.

그렇다. 나는 드라마작가를 꿈꾸기 시작한 새싹 지망생을 열심히 ‘말리고’ 있었다.

까딱하면 인생 말리는 수가 있다고 협박하면서.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들에게 응원보다 걱정이 앞서는 건,

첫째, 드라마작가가 되는 길이 말 그대로 바늘구멍처럼 좁기 때문이다.    

 

경쟁은 교육원에서부터 시작된다.

드라마작가를 육성한다는 교육기관 중에 가장 유명하고, 배출한 작가도 가장 많은

‘한국방송작가협회 작가교육원(이하 교육원)’을 보자.

(교육원에 대해선 뒤에 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탈락자가 꽤 나오는 면접을 거쳐야 등록할 수 있고,

첫 과정인 기초반에 등록한 300여명 중 최종 창작반까지 승급하는 사람은 15명 안팎.

겨우 5% 정도다.


방송사나 대형 제작사에서 주최하는 극본 공모전의 경쟁률은 더 본격적이다.

미니 공모는 대개 4~500편, 단막은 2000여편 정도가 응모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선자는 보통 많아 봤자 대여섯 명이다.

넉넉 잡아 1%다.


공모에 당선되거나 다른 루트를 통해 집필 계약을 한 후에는 편성 경쟁이 남아 있다.

이젠 비슷비슷한 수준인 작가지망생들간의 경쟁이 아니라,

나보다 이름도 있고 실력도 있는 기성 작가들과의 경쟁이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문제는 한 번 그 산에서 길을 잃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거다.

여의도엔 배우지망생보다 많은 작가지망생들의 유령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해도 해도 안 되는데 해온 게 아까워서 여의도 바닥을 떠나지 못하는 거다.

(자꾸 '여의도' 얘기를 해서 의아할 수 있는데, 내가 지망생이 됐던 시절은 K사와 M사 모두 여의도에 있었고,

교육원도 여의도에, 대부분의 작가사무실도 여의도에 있었다. 그때가 여의도 시대였다면 지금은 상암 시대라 하면 될까.)


새싹부터 자르려는  말리려는 두번째 이유는,

드라마작가라는 직업이 기대했던 것과 (아주)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2년간 근무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에도 지쳤지만,  

 객관적인 데이터보다는 (윗)사람의 취향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불합리함과,

깍듯한 의전과 여우같은 눈치, 뻔뻔한 충성심까지 요구하는 조직생활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작가가 되면 내 페이스에 맞춰 일하고, 내 능력과 노력만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며,

불필요한 조직생활에서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몰랐다.

드라마 제작은 뼛속까지 '공동작업'이고,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은 어디서나 불합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드라마작가에겐 야근이 없다. 24시 영업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글이 안 써지면 배도 안 고프고 잠도 안 올 거라는 비상식적인 기대를 받는다.


내 능력과 노력의 최대치를 투입한 기획안과 대본들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고쳐야 할 쓰레기가 된다.

수정, 수정, 또 수정을 거듭하며 대본 토해내는 자판기가 된 기분을 느낄 무렵엔,

나도 모르게 제작사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방송이 시작되면 더 많은 수정 요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제작사, 협찬사, 감독, 배우들, 모두 자기 입맛에 맞는 대본을 원한다.

회사 다닐 때 부장용, 상무용, 사장용 보고서를 각각 따로 만들어야 했던 게 떠오른다.

출퇴근만 안 했다 뿐이지, 드라마작가는 예술가보단 회사원에 가까운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가주의를 고수하고, 수정이 거의 필요없는 고퀄리티의 초고를 뽑아내는 작가들도 있겠지만,

'선생님' 호칭을 듣는 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라고 본다.)


세상에 안 힘든 직업이 있겠냐마는, 드라마작가라는 직업만의 특별한 고충이 있다.

드라마가 방송되는 2개월 (연속극은 6개월) 동안 작가의 사생활은 올스탑된다. 부모님 생신도 친구의 결혼도 아이의 입학식에도 참석 못할 수 있다. 어느 작가는 방송 중 부친상을 당했는데, 그래도 방송을 펑크낼 순 없어 장례식장 병풍 뒤에서 대본을 썼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방송 기간에만 한정되는 얘긴 아니다. 혼자 작품을 준비하는 수개월, 수년의 시간이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요일도 명절도 계절도 스쳐 지나간다. 가상의 세계에 몰두하다 보면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사소한 일상의 풍경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주변의 대소사들,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건 겪어보면 생각보다 많이 아쉬운 일이다. 이게 드라마작가라는 직업을 선뜻 추천하기 어려운 세번째 이유다.


그래도, 그  모든 어려움과 아쉬움을 감수하고라도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은 당신.
그런데  왜 시작을 망설이고 있는지?

재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나이가 적거나 많아서? 문학 전공이 아니어서?


정말 재능이 특출나고 문학을 전공했고 나이가 적당한 사람들만 드라마작가로 데뷔하는 걸까?


다음 글에선 대체 어떤 사람들이 드라마작가가 되는지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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