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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Feb 15. 2019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줄 단 한사람

벌써 세 번째 실패.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할지 모르지만...

아침부터 눈이 참 이쁘게 내린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서 자라서, 눈을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창밖 풍경이 눈에 덮여 하얗게 변해 있다면, 그 날만큼 신나는 날이 없다.

세수도 안 하고 패딩만 둘러 입고 나가 눈을 맞고, 발자국을 내고, 쉬는 날이라면 남편에게 눈사람을 만들자 조른다. 괜히 하루종일 웃음이 난다.  

그런데 오늘은 신이 나지 않는다.

그냥, 어, 눈이 예쁘게 오네, 하고 끝이다. 입꼬리가 조금도 올라가지 않는다. 


3일 전, 3차 인공수정의 실패를 확인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1, 2차 때와는 달리, 속상하다기보다는 허무한 감정이 몰려왔다. 

안 되는 건가. 그런 건가.


출근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퇴근할 때 약국 들를 수 있으면 타이레놀 좀 사다줘."

생리를 시작했다는 신호다. 

알겠다는 듯 익살스럽게 경례를 하는 이모티콘이 온다. 

나도 눈에 하트가 뿅뿅인 이모티콘을 보낸다.


지금 남편은 어떤 기분일까.


거울을 보니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내가 보인다. 

밤새 울었을 때보다도 흉한 얼굴이라, 화들짝 놀란다. 이번엔 좀 괜찮은 줄 알았는데.

눈물이 빠져나오지 못해서 그런가. 눈물이란 게 그렇게 독한 것인가. 억지로 빼내게 슬픈 영화라도 봐야 하나.


일이 많아 늦게 퇴근한 남편과 간단하게 차린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

남편은 생리나 시술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얘기하고 싶은데. 얘기할 사람이 당신 밖에 없는데. 

(엄마에게 털어놓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지만,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의 버거움을 안고 있어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다 먼저 얘기를 꺼내봤다. 

"기분이 어때?"

"...좋지는 않지. 흐흐."

좋지는 않구나. 그렇구나. 

기대했던 대답은 '당신이 힘들게 노력한 거 아는데 잘 안 돼서 안쓰럽고 속상해.'나, '당신이 많이 실망했을까봐 하루종일 걱정했어.' 정도였던 것 같다. (대화 전에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대사를 상상하는, 직업병 같은 버릇이 있다...)

혹은, 남편이 먼저 울어주면, 부둥켜안고 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했던 것 같다. 

언짢아지는 기분을 누르고, 먼저 위로를 건네봤다.

"한 달 동안 주사도 놔주고 질정 넣는 것도 도와주고, 고생 많았어."

"고생은 자기가 더 많이 했지."

그게 핸드폰으로 레이싱게임하면서 할 말은 아니잖아, 여보?

슬슬 부아가 치민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는다. 

"왜 충분히 위로해주지 않는 거야? 내가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안 우니까 괜찮아 보여?"

"내일 소고기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소고기는 소고기고!"

빽, 소리를 쳤지만, 입에는 벌써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남편은 나를 너무 잘 안다. 

약오르지만 다시 이불을 잘 덮고 눕는다. 

"어디로 갈 건데?"

 

숯불처럼 은근하고 뜨뜻한, 남편의 위로


다음 날 저녁, 동네 고깃집에 갔다. 한우는 아니고 호주산 와규를 파는데, 고기도 훌륭하고 다른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아 마음에 쏙 들지만, 자주 가기엔 가격이 조금 부담스러운 곳이다. 쌀쌀해진 날씨에, 외풍이 드는 입구 앞자리 밖에 남지 않은 게 아쉬웠는데, 왠일로 남편이 예약을 해놨다. 따뜻한 안쪽 자리에 앉으니, 숯불이 먼저 나온다. 온기에 손을 녹이며 생각한다. 이 온기가 남편 같다고. 


무심한 말들로 나를 서운하게 할 때도 있고, 나만큼 간절하지는 않은 것 같아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실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도 감정이 크게 요동치지 않는 남편 덕분에, 나도 오래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항상 같은 온도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있어줄 사람. 


센스 없는 위로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날따라 부채살이 살살 녹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우리는 2인 3각 달리기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의욕을 잃고 뒤쳐지면, 그 짝꿍 혼자 앞서 나갈 수가 없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짝꿍도 같이 넘어지기 때문에, 누가 누굴 멋지게 손 잡아 일으켜 세워줄 수도 없다. 각자 땅에 손을 짚고 스스로, 동시에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나서 서로 엉덩이에 묻은 흙이나 털어주고, 손 잡고, 다시 뛰어가면 된다. 함께 뛰어갈 사람이 있으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일어날 수 있다. 


다음에 눈이 내리면 일부로라도 활짝 웃어봐야지.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봄꽃을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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