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질문은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보통은 "나라면..."으로 시작하게 된다.
여러 질문거리를 품고 있는 영화, 다음 주에 개봉하는 <칠드런 액트>를 미리 보고 쓴다.
(영화 후반부 내용이 나오는 글입니다. 스포가 싫으신 분은 영화 관람 후 읽어주세요.)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배우 엠마 톰슨이, 직장에서는 어떤 정점에 올라 있지만 부부 관계에서는 위기를 맞은 일중독자, 피오나를 연기한다. 피오나는 칠드런 액트, 그러니까 아동법 관련 송사들을 담당하는 판사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영국의 아동법은 어른들(주로 부모들)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법인 듯하다. 분리 수술을 하면 한 명만 살릴 수 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곧 둘 다 죽을 상황인 샴쌍둥이가 있다. 그들의 부모가 생명을 거두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다며 수술을 거부할 때, 피오나는 아동의 복지(그 첫째는 생명)를 최우선으로 하는 법의 이름으로 수술을 진행할 것을 명한다.
쌍둥이 부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에 난감해하면서도, 피오나는 판결을 후회하지 않는다. 법에 따른 결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옳은 판단'을 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이제, 피오나를 오랫동안 혼란스럽게 할 문제의 사건이 배당된다. 세 달 후 만 18세가 될 '소년 A'에게, (그의 의지에 반하여) 수혈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명령해달라는 병원 측의 청구다. 하필 남편이 집을 나간 날이라 날카로워져 있던 피오나는, 사무관에게 A, A, 하지 말고 이름을 말하라고 핀잔을 준다.
소년 A, 애덤은, 덩케르크의 소년병 핀 화이트헤드가 연기한다. 그는 여전히 전쟁 속에 있다. 어쩌면 2차 대전보다 더 공포스러울, 스스로 생과 사를 저울질해야 하는 전쟁 속에.
애덤과 그의 부모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백혈병에 걸린 애덤은 수혈을 받지 않으면 위독해질 수 있는 상태지만, 종교는 수혈을 금지하고 있다. 피는 생명보다 신성한 것이고, 남의 피를 받는 것은 '오염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애덤과 그의 부모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종교의 율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성인인 경우 본인의 판단에 따라 병원의 치료를 거부할 수 있지만, 아동은 다르다. 법으로 치료를 강제할 수 있다. 아이는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게 법의 판단인 것이다. 애덤 측 변호인은 애덤이 '거의' 성인임을 강조하고, 병원 측은 '아직은' 성인이 아님을 읍소한다. 고민 끝에 피오나는 휴정을 선언하고 애덤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 병원으로 향한다.
판사가 사건 때문에 법정 밖으로 나오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고, 애덤도 그걸 잘 알고 있다. 영국에서 여성 판사를 부르는 공식 호칭인 '마이 레이디'는, 애덤이 피오나의 방문에 대한 놀라움과 설렘으로 탄식하듯 그 말을 뱉었을 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순교자라도 된 듯한 감정에 취해 있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애덤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신의 판단이 아닌, (자신을 살릴) 판사의 판결에, 마이 레이디의 손 끝에 매달리고 싶어 진다. 이때 애덤에게 피오나는 신을 대체해줄 대상이 된다.
피오나는 수혈 거부가 정말 애덤 본인의 의지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를 만났지만, 그에 대한 냉정한 판단보다는, 애덤의 영리함과 반짝반짝 빛날 그의 미래가 너무 아깝다는, '감정'을 품고 돌아가 판결을 내린다.
판결 이후, 목숨은 건졌지만 종교는 잃은 애덤은, 투병만큼이나 괴로운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혼란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상황을 이렇게 만든) 피오나뿐인 것 같다. 하지만 피오나는 끝내 애덤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자신은 선을 넘었으면서, 애덤이 선을 넘으려 하자 겁을 내고 도망치는 것이다. 하긴, 자신을 신처럼 바라보는 이를 받아주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시 한번 생과 사의 기로에 서게 된 애덤은 이제 성인이어서, 부모나 법의 간섭 없이 온전히 자신의 뜻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만의 선택을 마친 그의 얼굴은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편안해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비난한다. 생명보다 귀한 가치는 없다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확신을 갖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소설과 영화들은 '이래도?', '이래도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미 비포 유>나 <씨 인사이드>처럼 지독한 신체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야기는 비교적 공감을 일으키기 쉽다. 건강을 잃은 삶은 죽음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넓게 보면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에 싸인을 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에 비해, 정신적인 가치를 잃었을 때 삶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은 공감받기 어렵다. 애덤처럼 신앙을지키기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들, 명예나 사랑을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을 봤을 때 우리는 그들이 '어리석다'며 안타까워한다. 이 영화는, 연약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애덤의 마지막 얼굴은, 그가 정말 어리석어 보이냐고, 당신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었을 때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피오나는 애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남아있는 삶과 사랑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걸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자신이 그를 외면했으면서 말이다.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죽음을 선택한 이를 비난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건, 최소한 그를 지키려고 애쓰기라고 했던 사람들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면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구할 수 없었지만 참 아까웠던 죽음들이 떠오른다. 모두, 어리석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