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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3. 2020

<사마에게>, 절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말 것

위험하고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방법

1월 23일 개봉하는 영화 <사마에게>를 시사회 초대로 먼저 보았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72회 칸 영화제에서, <사마에게>는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인정받아 '황금눈상'(Golden Eye prize)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60여 개의 상을 받았다고 하니, 정말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화려한 수상이력이 아닌, 포스터에 메인 카피로 박힌 - 감독의 나레이션 중에도 등장하는 - 한 문장이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를 용서해 줄래?"


영화는 한 여자가 아기를 얼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번 방긋 웃어주면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은 아기의 얼굴도, 그런 아기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우리가 겪었거나 보아 왔던 익숙하고 평온한 모녀의 모습이지만, 그 평화는 금세 깨지고 만다. 폭탄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고, 엄마는 지하로 피신하기 위해 서두른다. 아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카메라를 든 채로. 


이곳은 반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로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 비행기가 무차별 폭격을 일삼는 곳, 알레포다. 


엄마 와드는 딸 사마에게, 이런 위험한 곳에서 널 낳고 키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와드를 비난하고 싶어 진다. 


그러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할 수 있지? 본인이야 목숨 걸고 그곳에 남은 이유와 선택이 있었겠지만, 아이는 선택지가 없었잖나. 용서해달라고 하면 단가? 공습으로 아이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했으면? 도대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영화를 보고 나면 와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와드가 카메라를 처음 들었던 건 딸을 만나기 한참 전인 대학 시절, 반독재 운동에 참여하면서였다. 


부모님은 상황이 안 좋아질 것 같으니 고향으로 돌아오라 했지만, 와드는 그런 부모님의 말을 들을 리 없는, 조금 고집이 세고, 많이 긍정적인 청년이었다. 알레포에 남아 있는 자체가 저항이고, 버티다 보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많은 청년들이 있었다. 와드는 국내 언론이 외면하는 알레포의 상황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인터넷에 올려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알레포에 남은 31명의 의사 중 한 명인 함자와 사랑에 빠진다.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병원 환경도 열악해진 상황에서, 함자와 동료들은 공습에 다쳐 실려오는 사람들 - 주로 여자와 아이, 노인들인 것으로 보인다 - 을 치료한다. 하루 동안 봐야 하는 환자가 수백 명, 집도하는 수술이 수십 건이다. 


와드는 병원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함자의 일만큼 와드의 일도 중요하다는 걸,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의식이 없는 아들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온 엄마는 카메라를 보고 소리 지른다. 이걸 찍고 있냐고. 다 찍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영화는 시신들까지 모자이크 없이, 아주 가깝고 선명하게 보여주는데, 그 참혹함이 너무 생생하고도 갑작스러워서 나는 충격을 넘어 어리둥절한 기분까지 느꼈다. 


이렇게까지 보여줘야 하나? 


TV를 보다 구호단체 홍보영상의 뼈가 앙상한 아이들만 봐도 마음이 불편해져 슬쩍 채널을 돌려버릴 때가 많은 나다. 영화관에선 채널을 돌릴 수도 없고. 관람석에 꽁꽁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버리면 그만인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보여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막연하게는 알 것 같아서. 두 눈 똑바로 뜨고 감독이 보여주려는 걸 봐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가망 없어 보이는 환자를 살리려 애쓰는 절박한 장면에서는, 멀미가 날 것 같아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내가 눈을 감은 그 순간, 관람객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환자가 기적처럼 깨어나 있었다. 


처참한 장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는 분들은 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기를 권한다.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면, 상영관에 들어섰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볼 수 있기를 응원한다.

그래야 절망 뒤에 숨은 희망을, 전쟁 속에 숨은 삶을, 그곳에서 아기와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 부모의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영어 포스터의 메인 카피는 "An intimate and epic journey in to the female experience of war"다.

엄마로서의 선택보다는 한 여성의 삶 자체에 집중하는 시선이 담겼다.)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은 누구도 와드의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 중 많은 이들의 부모님이 전쟁통에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의 부모님은 일제강점기에 나서 자랐고. 비관적인 상황이라고 사랑도 아기도 포기했다면 우리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거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삶과 사랑을 포기시킬 수 없다.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그의 선택이다. 꼭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이런 세상'에 살게 하기 미안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비슷한 생각들을 한 적이 있다. 미세먼지부터 고령화 사회, 전쟁의 위협까지,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보다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두려움의 근거는 차고 넘친다. 


와드도 두려웠을 것이다. 끝없이 병원으로 실려오는 다치고 죽은 아이들을 보며, 내 아이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찢어졌을 거다. 아기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는 친척들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을 거다. 하지만 와드와 하산은 사마와 함께 알레포에 남기로 한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곳에서 할 일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때 사마는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생명에서, 정의와 자유를 향한 싸움을 함께 하는 전우가 된다. 친척들 말대로 사마를 혼자 피신시켰다면, 이 영화는 사마에게 남긴 유언장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마가 없었다면, 사마가 주는 힘이 없었다면, 와드와 하산과 그 동료들은 버티기도 싸우기도 훨씬 어려워졌을 테니까. 


지금 와드와 하산, 사마는 알레포가 아닌 영국에 있다고 한다. 그들이 안전해졌다는 데에 안심하면서도, 드레스를 입고 영화제에 참여한 와드의 모습은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몇 년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사람들에게, 이제 알레포는 잊은 거냐고, 변한 거냐고, 자격도 없는 의심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하지만 와드는 지금도 알레포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인데. 


영화를 보고 나서 난민기구에 후원금을 보낼 수도 있고, 우리와 더 가까운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어 질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정치인을 뽑기 위해 후보들보다 더 열심히 선거를 준비할 수도 있고. 

세상이 너무 빨리 망해버리진 않도록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그게 무슨 일이든. 


그래야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지언정 부끄럽다는 말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일단 이 글을 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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