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지 않는 삶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말》 사라진 몸, 남겨진 하루

by 엘리킴


나는 가격표를 먼저 본다.
무엇이 필요한지가 아니라
무엇을 살 수 있는지가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계산은 손보다 먼저 움직인다.
두부 하나, 우유 하나,
봉지 라면 두 개.
합하면 얼마,
이걸 뺀다면 나머지는 무엇.
필요는 늘
계산에 지는 쪽이다.


나는 자주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마트의 냉장코너에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손에 쥐었던 걸
아무 말 없이 다시 놓는다.


내가 사지 못한 것들로
냉장고는 비워지고,
비어 있는 냉장고를 보며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주어진 것 안에서만
모든 걸 결정해야 하는 삶.
새로운 음식, 낯선 가게,
기억이 나지 않는 맛집 같은 말은
나에게는 이야기 바깥의 일이다.


나는 익숙한 것만 산다.
왜냐하면
모르는 걸 사면 계산이 틀리니까.
지출의 차질은
곧 하루의 균열이니까.


가끔은 숫자 없이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먹고 싶은 걸 먹고,
필요한 걸 말하기 전에
살 수 있는 그런 하루.
하지만 그런 하루는
계산기 바깥에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장 저렴한 선택을 하고
가장 작게 포장된 마음으로
가장 조용히 하루를 넘긴다.


계산하지 않는 삶은
비로소 계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먼 이야기다.










from. 기초생활 수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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