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숙소 구하기
극적으로 치앙마이행 비행기표를 구했다.
다음은 19일을 ‘어디에서’ 머무를 것인가였다. 중간 귀국도 고려했기 때문에 한 곳에서 머무는 것이 부담됐다.
“혹시 여행 중간에 올 수 있어?”
“안돼, 그때 미국 임원들 와서 바빠. 까꿍이는 누가 봐? “
‘치사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속으로 외쳤다. ‘그래, 나 혼자 가고 만다’ 나 혼자 끝내는 수밖에 없다. 우는 소리 그만하고 현재에 집중하자. 아이들 위주의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아고다(agoda)를 켰다. 리뷰를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난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있으니 꼼꼼해진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숙소들을 소거하니 갈 수 있는 곳이 얼마 안 남았다.
에어비앤비, 호텔, 리조트, 레지던스, 홈스테이
치앙마이의 웬만한 숙소는 다 본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예산이다. 나의 예산은 200만 원. 심지어 11,12,1월은 성수기다. 결국 여행 2일 전, 예산에 맞는 숙소를 겨우 하나 골랐다.
낮은 가격의 홈스테이다.
가격대도 맞고 평점도 높다. 조식도 주고 수영장도 있다. 아이들이 신나게 수영하는 사진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중심가에서 거리가 멀어요’라는 리뷰는 애써 무시했다. 선택지가 없었다. 이 가격에 수영장과 조식을 제공하는 곳은 없었다. 2박을 예약했다.
호스트와 채팅을 했다. 그녀는 내가 애 둘을 데리고 간다고 하니, 무료로 공항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여행의 시작이 좋다. 그렇게 눈물의 비행을 마치고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장을 나오니 내 이름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그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6살 된 딸이 있다던 그는 아이를 다루는 게 능숙한 호스트의 조카였다.
“Grandma?”
그렇다. 호스트는 77세의 노인이었다. 타이 항공에서 30년 동안 승무원으로 근무한 그녀, 세련되고 키가 큰 타이 할머니,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짧은 인사를 뒤로 하고 그녀는 사라졌다.
후, 왔다. 왔어. 내가 드디어 치앙마이에 왔다. 애들은 곯아떨어지고 나는 어색함에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새소리에 잠이 깼다. 창 밖으로 바나나 나무가 보인다.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태국어다.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치앙마이다, 내가 혼자서 애 둘을 데리고 치앙마이에 왔구나.
“엄마? 저건 뭐야? 그리고 이 소리는 무슨 소리?”
“응, 저건 바나나 나무고, 이 소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야”
신난 아이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숙소는 크고 아름다웠다. 구석구석 타이 느낌이 물씬 났다. 메이드 두 명이 인사를 했다. 입은 거짓이고 눈은 진실이다. 영어는 못 했지만 눈빛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아이들을 보는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들은 정성껏 아이들을 돌봐 주었다.
‘내가 잘 선택했구나’
초여름 날씨와 따뜻한 미소가 어우러지는 곳, 여긴 주택가에 있는 치앙마이 홈스테이였다.
나는 태국 방문이 첫 번째가 아니다. 무려 네 번째 방문이다. 그동안 호텔에서 머물렀기에, 이렇게 전통적인 숙소에선 처음 머물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장 타이스러운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을. 구석구석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30년 살았다던 그녀의 안목은 남달랐다. 조식당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그곳엔 물고기가 가득했다. 중간중간 닭이 꼬끼오 울기도 하고 길냥이도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밤이면 도마뱀이 천장을 기어 다녔고 이름 모를 꽃과 새들이 마음껏 지저귀었다. 처음 계획과 달리 숙소가 좋아 4박을 추가했다. 6박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일이 생겼다.
여긴 주택가라 근처에 슈퍼도, 가게도 찾기 어려웠다. 3일째 되는 날 배고픈 나는 식당을 찾아 헤맸다. 20분을 걸어 작은 노점을 겨우 찾았다. 팟타이 2인분을 주문했다. 근처 슈퍼에서 방울토마토, 식빵 등을 함께 구매했다. 숙소로 돌아와 아이들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 구토와 복통 증세가 이어졌다. 울렁거려 밤을 꼬박 새웠다. 팟타이를 거의 먹지 않은 아이들은 잘 잤다. 다행이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구토 증세는 이어졌다. 아이들은 내 등에 올라타고 놀자며 방방 뛰었다. 힘들었다, 호스트에게 증상 얘기를 했다.
“길거리 음식은 조심해야 돼, 현지인인 나도 길거리 음식은 잘 먹지 않아. 병원에 전화했는데 식중독 같대. 응급실로 바로 가면 된다고 하니 지금 병원으로 가자 “
감사하게도 호스트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나에게 신경을 써줬다. 식중독이라니 눈앞이 깜깜했다. 내 약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만 신경 쓰느라 나를 돌보지 못했다. 어른 약은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이들에게 ‘엄마 병원에 가야 해. 이곳에서 태국 이모 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어’라고 하니, ‘엄마, 나도 아파. 나도 같이 병원 가’ 아이들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2살 1살짜리 아이들이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고 병원에 갈 채비를 시작했다.
안 되겠다, 아이들이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하루 두고 보기로 했다. 대신 호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들 밥을 챙겨줄 수 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스파게티를 주겠다고 하며 너는 쉬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스파게티 냄새가 확 나면서 애들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쉿, 쉿’ 소리를 내는 호스트와 메이드의 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아이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저녁이 될 때까지 잠을 잤다.
나는 그렇게 여행 5일 차를 맞이했다. 그녀는 저녁식사에 우리를 초대했다. 메뉴는 점심과 같은 스파게티.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77세 호스트와, 81세 호스트 남편과 우리. 세대와 국적을 초월하는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Chiangmai people never say ‘NO’”
81세 호스트의 남편이 말했다. 그는 치앙마이 사람들이 거절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인상 깊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여유롭게 만들었을까.
시골에 사는 남동생이 서울에 와서 했던 첫마디가 있다
“누나, 서울 사람들은 거절을 너무 잘해.”
거절을 잘한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국민성인가 아니면 지역특성인가, 서울과 치앙마이를 비교하며, 저녁 식사는 끝났다.
다행히 몸은 조금씩 나아졌다.
마지막 날, 아이들의 생필품을 사기 위해 메이드와 함께 근처 슈퍼에 다녀왔다.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고 태국어로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화답했다. ‘아이들 예쁘다는 얘기구나’ 태국어를 모르는 나는 넘겨 짐작했다. 만지작 거리던 100밧을 꺼냈다. 그녀에게 ‘코쿤카’라고 인사하고 팁이라고 하며 100밧을 건넸다. 그녀는 당황해하며 거절했다. 민망해진 나는 그녀에게 간식거리를 사다 주었다. 그녀는 ‘코쿤카’라고 말하며 화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산책은 끝이 났다.
마지막 날은 나에게 ‘보은 하는 날’이었다. 도착 첫날 우리를 데리러 와준 그녀의 조카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해 마음이 쓰였다. 1시간 넘게 기다렸음에도, 그는 웃으며 우리를 배웅 해줬다. 그에게 줄 300밧을 ‘코쿤카’라고 적은 봉투 안에 넣었다. 그에게 주는 팁이라고 하고 호스트 남편에게 전했다.
드디어 이별의 순간이 되었다. 다음에 또 들르겠다고 하고 그동안의 고마움을 짧은 영어로 표현했다. 영어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스트의 영어가 세련되고 유창했던 탓이리라. 77살의 나이가 무색했다. 그녀는 자신감에 충만했고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부러웠다. 나의 77살은 어떨까? 나도 그녀처럼 자신감에 찬 얼굴로 뭐든 할 수 있다고 세상에 외칠 수 있을까?
인사를 하는데 그녀가 나를 부른다.
“메이드들에게 100밧씩 팁을 챙겨줘 “
”(순간 정적, 놀람) 음… 사실 슈퍼에 갔을 때 내가 100밧 줬는데 그녀가 괜찮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먹을 거 사줬어 “
“ 아, 그래? 알겠어”
이게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이후 10일 넘게 치앙마이에 머물면서 아이들은 계속 할머니 숙소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다. 마지막에 팁을 챙겨달라고 했던 호스트의 태도가마음에 걸렸다. 조카에게 팁을 300밧을 준 게 화근이 되었다. 끝내 메이드들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다.
이번 일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팁을 요구했던 그 한 마디만 아니었더라도 이숙소는 완벽했는데, 역시, 시작보단 끝이 중요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