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 Oct 24. 2016

우리는 의자에 잠시 앉아 간다

사람만 바뀌고 일은 남아 있다

면접 잘 보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때 인턴 알아보던 기간이었을 겁니다. 10년도 넘었군요. 그 때 네이버에 찾아본 결과 인상 깊은 취업 도움글이 있었습니다.



"연극 시작한다 생각하고 면접장에 들어가세요"



마치 내가 아닌 듯 연극 배우처럼 할 일을 거기서 다 하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 피면접자"가 아닌 "면접자인 나 = 피면접자" 인 것이죠. 면접자가 당연하게 해야 할 말을 거기서 하고 오는 것이라면 뭐 그리 떨릴 게 있냐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무대이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렇게 하고 오면 연극의 흥행은 관객이 어차피 알아서 평가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이 말이 회사 생활에도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출근하는 순간부터 나는 주말의 나, 혹은 가정에서 나, 친구 사이에서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죠. 나는 그냥 회사 안에서의 나일 뿐이었습니다. 손 빠른 Peter, 엑셀 잘 하는 Peter, 먼저 의견 내는 Peter...  그러면서도 눈치보는 Peter, 혼자서 작은 것에 스트레스 받는 Peter, 일을 망치면 자존감이 쭉쭉 낮아지는 Peter인 것이죠.


마치 영화 배역에 흠뻑 빠져 있으면 그 배역이 나 인것 같아서 오랜 기간 후유증을 앓는 배우처럼 직장 생활을 오래 할 수록, 집에 와 있는 시간에도 직장과 관련된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을 수록 '회사의 나'는 그냥 '나 자신, 그 자체'가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회사의 일이 나의 존재의 성패가 되고 퍼포먼스와 평가가 나를 대표하는 것. 직장의 이름과 연봉이 나를 말한다는 자본주의의 그늘처럼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디아블로의 보석을 이마에 꽂은 것처럼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죠.


자살을 하는 직장인을 보면 이성적으로 "저래서는 안돼" 싶으면서도 심적으로는 "오죽하면..." 싶을 때가 있습니다. 부조리한 직장은 외부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퍽퍽한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게 있습니다.



"연극 시작한다 생각하고 면접장에 들어가세요"



근처 야트막한 산만 올라가도 시내가 다른 시각으로 보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시끄럽고 답답한 도시도 어디 고개에 있는 공원에서 바라보면 멈춰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직장도 일도 커리어도 뭐라고 부르던 다 그렇지 않을까요?


일을 하다보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담당자가 누구든 그 일은 그 자리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한 분야를 10년 정도 바라보면 변하는 것도 있지만 하는 일의 본질 자체는 지독하게도 바뀌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일이 사람을 이겨버린 거 같이 그 자리에 오롯이 살아있는 거, 그거 참 무섭게도 느껴집니다. 사람이 누구든 그 일을 정복하고 이길 수 없습니다. 일을 대강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을 나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인 개체로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일은 나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연극 무대에 여러 의자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 내가 잠깐 앉아 있을 뿐입니다. 무대의 의자는 그냥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직을 하고 다른 무대의 비슷한 자리에 앉습니다. 좀 앉아 본 사람들은 무대의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무대이며 나는 배우란 것을 말이죠. 무대에서 잘 못해도 집에 가서 놀 아이들이 있고 혹은 연극을 마치고 같이 와인 마실 친구도 있습니다. 연극을 망쳐도 삶은 무대 밖에서 항상 존재합니다. 자연처럼요.



"연극 시작한다 생각하고 회사에 들어가세요"



오늘도 출근하고 퇴근하는 직장인들. 연극 무대가 힘들어도 그냥 연극입니다. 지나고 나면 그냥 연극이었을 뿐입니다. 의자에 앉는 게 아니라 연극 무대를 만드는 것은 더 힘들지만 그것 역시 연극입니다. 삶을 포기하면 연극도 못합니다. 삶을 더 잘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저도 한 때 연극 무대에서 빼어난 연기력으로 모두를 사로잡아 버리겠다고 마음 먹고 무리한 일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돌아보면 성패를 떠나 그것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볼 수 없는 연기의 시간만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음 연기자를 삼킬 배역의 의자는 배우보다 더 무섭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대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일은 분리된 존재하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무대는 대부분 비슷하고 조금의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일까요?


건투를 빕니다. 저 스스로도요.




작가의 다른 콘텐츠


매거진의 이전글 맞는 것은 맞다고 인정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