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살을 먹을 나와 우리에게
저는 족구를 싫어합니다.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으니 실력이 없었고 늘 피했죠.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족구는 제게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습니다. 가끔 사람이 없어서 할 수밖에 없던 군대나 회사에서의 족구는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안 하니만 못한 민폐, 빨리 이게 끝나길 바라는 대상이었죠.
족구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족구'라는 고착화된 제 인식 세계의 바로미터일 뿐이었습니다. 족구가 싫은 걸 지나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는 나이 정도에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못하는 건 안 한다'는 지극히 효율 중심의 인생관이 고착되는 시기였습니다. 사실 전략의 정석이 비교 우위를 통해 시장에서 내가 더 잘하는 역량으로 파고드는 것이기에 이 생각은 꽤나 공고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워크숍에서 족구를 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꽤나 당황스러웠는데 정말 빠지지도 못할 상황이 된 것이죠. 족구는 시작되었고 그 날 따라 이상하게도 초반에 티가 안 날 정도로 잘 되었습니다. 고도의 집중력이라도 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여지없이 쉬운 공을 삑사리 냈는데 주변에서 웃어주면서 격려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족구 역사상 처음 받아보는 리액션이었죠. 전에 찌푸린 표정, 말 없는 눈빛에 비하면 사실 별 것도 아닌 이 반응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족구 실력이 어디 가지 않지만 처음으로 재미란 걸 족구 하면서 느껴봤습니다.
이때 얻은 것, '도전해 보면 생각보다 별 거 아닐 수 있다' 이 생각은 저의 이전과 이후를 바꿔놓았습니다.
물론 족구 실력처럼 그런 생각 정도로 인생이 갑자기 달라지진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노오력'을 해야겠죠. 그렇지만 비교우위니 전략이니 장점이니 적성이니 하는 세상의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고 이후 저라는 황무지를 개간하기로 더 마음을 먹었습니다. 안 하던 코딩도 하고 직무도 바꿔보고 월급도 다른 회사에서 받아보고 이렇게 며칠 안 쓰면 온 몸이 사인을 보내는 브런치에 3년이 되어가도록 글도 쓰고 있고 그 결과 꿈에 그리던 출간도 할 수 있었고 모르던 분들과 글을 통해 알 수도 있었습니다. 그냥 하던 일만 해서 직업을 통해 승부를 보는 것도 멋진 인생이고 비교우위니 전략이니 하는 게 물론 더 맞는 말인 건 경험상 확실합니다. 족구는 족구니까요. 저도 도전을 하면서 잃은 것도 너무나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재미있는 인생에는 감히 더 가까워졌다고 자부합니다. 족구가 두려움이었다면 가지 않은 길이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거 없습니다. 물론 무모한 길로만 간 것은 아닙니다. 직무는 스스로의 철학에 충실한 상태에서 바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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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 되면 제 편견과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은 더 강하게 저를 덮쳐 올 것이고 저는 또 다른 두려움과 혼자 싸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족구 하던 그 순간을 생각할 것입니다. 아직 황무지인 저를 개간하고 열심히 부려먹을 겁니다. 물론 하고 싶었던 일, 맞다고 생각되는 일을 위해서 말이죠. 인생은 짧고 내년이면 더 짧아질 테니까요. 저와 여러분이 낼 삑사리에 미리 격려의 박수를 드립니다. 올 한해도 제 브런치를 읽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