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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Mar 04. 2016

늦은 승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방향을 알고 선선히 가는 범선처럼

아프리카의 허니문 명소 '모리셔스'는 사탕수수와 모형 범선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다들 시내 관광을 나가고 돌아오는 길에 수도 '포트 루이스' 근처의 배 모형 상점을 들르곤 합니다. 여기에는 17~18세기 실제 범선의 설계도 그대로 줄여놓은 모형 배 모형이 전시되어 있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의 배를 사 갔습니다. 보기만해도 멋있거든요. 왠만한 프라모델을 만들었던 이삼십대 친구들이라면 분명 호감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국 사업가들도 이곳을 들러 모형 선박을 많이 사 간다고 합니다. 천천히 가지만 목적지를 알고 바르게 가는 배처럼 자신의 사업도 느리게 보일지 몰라도 바른 방향으로 가길 바라는 염원 때문이라네요. 뭐 간단하고 어찌보면 뻔한 이유일 수 있지만, 일상에서 이 말은 가끔 큰 위로를 줍니다. 인생길에 정답이 없다지만 좌우 의식을 때로 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지 일깨우는 말이니까요. 특히 조직에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일 비교와 평가의 연속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우리나라 조직에서는 이런 평가가 자리와 보수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방향이 아닌 속도로 직장생활을 하려는 사람도 많죠. 한 번 떨어지면 다시 올라올 수 없는 구조가 많으니까요.


저도 승진 누락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일하는 직장에서 몇 년간 흥망성쇠를 사업에서도 사람에서도 보면서 빠른 승진이 꼭 좋은 것도, 늦은 승진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왕이면 남보다 빨리 인정받아 리더가 되고 도태되지 않는 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케이스도 많습니다.



거품


태양 가까이 날면 날개가 녹는... 그런 신화는 아니지만 실제 날개가 부실한 사람은 태양 근처에서 빨리 녹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내공'. 내공이란 게 뭘까요? 실제로 어디가 핵심이고 어디가 문제인지 사업 전체의 구조를 간파하는 능력. 작고 불필요한 부분을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게 아닌 것. 실제 일하면서 내공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내공을 쌓는 일은 대부분 고생을 많이하고 어쩔 때는 회사 내 권력지형으로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자리도 있으니까요. 회사가 회사의 관념으로 밀었던 인재들이 위기를 맞는 것은 의외로 빠른 승진에 있습니다. 반면 이름이 없지만 꾸준히 버티고 내공을 기른 사람은 늦지만 적시에 리더가 될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만약 기회가 안 와도 괜찮습니다. 그런 회사는 다닐 필요도 없고 '지음'을 만나는 게 더 낫죠.



기획?


기획자로서 기획 직무를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 여러 아티클을 통해 기획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죠. 하지만 기획을 처음부터 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요즘 신입사원이나 구직 과정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전략', '컨설팅', '기획'을 '영업', '물류', '생산'보다 선호하는 직무로서 시작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직장에서 겪어보면 가장 기피하게 되는 사람은 '실무 경험 없는 기획자' 혹은 '실무 경험 없는 컨설턴트'입니다. 현업을 모르는 상사처럼 쉬운 일을 어렵게 하는 데 능숙합니다. 내공을 쌓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있습니다. 좋은 기획자는 어려운 현장 경험에서 나옵니다. 지금 일이 힘들고 얼룩진 직무라도 사업의 실체를 알 수 있다면 잘못된 방향은 아닙니다.



그냥 관리자


속도만을 추구하는 직장 생활은 그냥 '000회사맨'으로 경력을 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회사를 벗어나면 할 일이 별로 없는 다 알지만 다 못하는 그냥 관리자가 많죠. 반면 자신의 영역 하나를 바꿔나가고 그것 중심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사람은 어딜 가든 원하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커리어는 자신의 욕심으로 직장 내 직무 변경이나 빠른 관리자 루트를 밟고 올라갈 때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속도가 나지 않더라도 핵심 직무를 살리고 있다면 그건 실패가 아닙니다.



누구나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실패가 적은 선택을 할 확률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나이가 들수록 받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방향을 맞추는 것. 그리고 중간중간 속도와는 무관하게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 제가 허니문 때 구입한 배 모형을 가끔 주말마다 보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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