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 단단히끼였다>(2020,책밥)중에서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초보 팀장
오늘도 야근이다. 저녁이 되자 하나둘 자리를 뜨고 결국 남은 사람들은 관리자들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비슷한 그림이다. 가끔 이제 일을 배우거나 부서를 옮긴 친구들이 야근을 하는 동료가 되지만 상당수는 초보 팀장이다. 왜 우리는 야근을 할까? 야근을 하는 팀장들에게 더 높은 상사가 와서 격려한다고 한마디씩 건넨다.
“원래 팀장을 처음 하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그래도 살살해가면서 해. 오늘만 날인가. 어서 들어가.”
이렇게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퇴근할 생각이 없다. 무관심보다는 고맙지만 실상 야근하는 이유는 선배의 말과 사정이 좀 다르다. 실무와 관리, 두 가지를 놓지 못해서다. 마이크로 매니저가 되는 것은 싫다. 그래서 일의 초반에 내용을 잘 공유하고 원하는 결과의 이미지와 방법론에 대해서 서로 합의만 되면 일이 돌아가는 중간에는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는다. 그건 서로의 역할을 넘어서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실무를 손에서 놓기도 싫다. 그래서 대부분의 초보 팀장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실무를 나눠서 계속 맡고 있다.
보통 이런 식이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야 하는 프로젝트나 중요한 의사 결정과 관련된 일은 팀장이 직접 실무를 맡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팀원 중에서는 이런 것을 해본 경험이 없거나 있어도 아직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래서 팀장의 일은 무겁다. 중요한 일이 많으니까. 연차가 더 쌓인 선배 팀장은 반대로 아예 중요하지 않은 일만 맡고 중요한 일은 팀원에게 주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후배가 회사에 더 알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중요한 일을 주는 것 같다.
어떤 식이든 팀장이 실무와 관리를 함께 맡는 순간 관리의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된다. 사실 관리는 벗어날 수 없다. 그냥 틈틈이 빨리 쳐내는 것에 가깝다. 많은 문서 작업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보고와 취합이 회사라는 조직 특성상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당장 회사 야유회를 가도 누가 가는지 조직별로 조사하는 메일이 온다. 이렇게 툭툭 치는 펀치를 계속 맞다 보면 나중에는 정신 차리기가 힘들 정도로 평정심이 무너진다. 정말 중요한 일을 몰아서 해야 진도가 나가는데 잽을 맞듯이 잡무 관리를 쳐내면 중요한 일을 몰아서 할 겨를이 없다.
“중요한 것부터 해. 긴급하고 중요한 업무를 따로 구분해서 하란 말이야.”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관리는 하찮게 보이는 사안도 대부분 급하게 내려오곤 한다. 높은 수준의 결과물, 새로운 기법을 요구하면서 관리를 다 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서 팀원 중 한 명을 나 대신 테크 리드로 만들거나 관리 요소 자체를 팀원들까지 작성하게 하는 게 방법이지만 둘 다 이상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과연 월급을 더 받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정말 관리, 매니징인가? 시장을 돌아보면 그게 가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실력자 선배들의 이직
저녁에 시간을 내서 몇 달 전 다른 회사로 이직한 선배를 만났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력자. 좋은 회사로 이직한 것도 실력자의 증표지만 이미 같이 있을 때부터 실력자였다. 저런 사람이니까 저런 데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가 왜 이직한 줄 아냐? 계속 파워포인트 문서만 만들다가 어느 날 회사 그만둘 것 같았거든. 나는 개발을 계속하고 싶었어.”
회사는 실무의 실력자들이 더 발전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력이 있을수록 실무와는 더 멀어졌고 실무를 못하는 사람일수록 더 오랫동안 실무를 하게 되었다. 실무를 잘하면 오히려 자기 꿈, 커리어가 달라져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전통적인 기업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선배는 전통적이지 않은 회사로 갔다.
“우리 회사는 아무도 매니징을 안 하려고 해. 그냥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문서 작성 방식이 조금씩 달라. 각자 자기 파트 나눠서 작성하고…”
벌써 우리와는 달랐다. 끼인 세대가 부러워하는 환경. 관리라는 게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자기가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분야에서 각자 역할에 맞게 관리에 해당하는 것을 하고 있었다. 관료제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 혹은 업무에 따라 서로 다른 조직이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일하는 조직. 실무를 잘 하면 계속 실무를 하면서 일할 수 있는 골격은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래, 야근을 해도 어떤 일로 야근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파워포인트 문서를 만들면서 퇴근을 못하고 있으니 후배가 고생한다고 말하며 퇴근하는데 그 말이 마치 ‘이런 걸 하느라 고생한다’라는 것처럼 들렸다. 실무를 하면서 혼자 사무실에 남아 금요일 저녁을 컵라면으로 때워도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뭘 배우고 있는 걸까.
신입 사원 때는 하지 않았던 고민을 지금 와서야 하고 있다. 이제는 위로 올라간다고 편한 것도 아니고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지도 못한다. 층층 구조의 결제 라인은 간편하게 바뀌었고 뭔가 중요한 사안이 위에서 떨어졌을 때나 만들었던 TF 팀도 수시로 생기고 있다. 매년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 말이다. 어느 날 야근을 하는데 나를 격려했던 그 선배가 저녁 먹으러 가자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실은 너는 그래도 좀 나은 거야. 나는 하루하루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 미팅만 하다가 하루가 가는 거 같다. 이러면 나한테 남는 게 뭐가 있겠어. 위에서는 매주 뭘 그렇게 써오라고 하고. 나는 커리어가 죽어가고 있는 기분이야. 퇴근하고 집에 가서 뭔가를 봐야 한다니까.”
이미 관리자 라인으로 걱정 없어 보이던 선배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철인으로 버텨가며 실무와 관리를 다 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눈 한 번 감고 조금 편하게 관리자로 돌아서는 것인가. 체력이 버틸 때까지는 계속 이 고민을 해가면서 야근을 한다. 어차피 야근을 줄일 방법도 내가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