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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병 아니고 은퇴병

책 <아,단단히끼였다>(2020,책밥)중에서

by Peter

이런 나는 꼰대인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나는 월급루팡처럼 아예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걸 다 팀원에게 시키는 나쁜 팀장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살아가게 된 게 나쁜 건 아닐 텐데, 자연스러운 것일 텐데 어딘지 자신이 없고 요즘은 뭔가 하나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날 눈에 띈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는 단어. 40세가 되기 전에 최대한 벌 수 있는 돈을 다 벌고 이후에는 적은 소비만 하면서 평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 와닿았다. 사실 나는 월요병이 아니라 은퇴병에 걸렸다. 어느 날부터 월요일이 싫은 게 아니라 내일이 싫어졌다. 언제까지 직장인으로 살기에는 체력이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집안일을 하거나 육아를 하는 피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출퇴근의 강도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부터 숱한 미팅에서 새로 연구해야 할 과제에 대한 수고와 가위눌리는 것이 점점 잦아지는 현 상태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며칠 쉬면, 여름휴가 끝나면, 처음 이런 생각은 긴 유예기간을 두고 조용해졌다. 하지만 체력이 부치고 점점 배가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꼰대들이라 불리는 선배들은 편안하게 오늘의 PC방을 즐기고 있고 열정이 넘치는 후배들은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만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그냥 이 시기의 오춘기, 육춘기, 몇 춘기 같은 것의 재탕일까. 3년 차, 6년 차 등 직장인 퇴사 고민 시즌의 생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고민은 체력의 고갈과 함께 심화되고 있었다. 동기들 몇몇, 비슷한 연배의 가까운 선후배들과 저녁에 술자리를 가지면 이런 이야기는 단골 소재가 되었다. 어떻게 버티고 회사 생활을 하는가부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승승장구하는 또래의 이야기가 더 길어졌다.


하지만 나처럼 은퇴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나가는 소리로라도 이런 푸념을 하면 ‘돈 많이 모아두었냐’라는 현실 인식이 담긴 말만 되돌아올 뿐이다. 나도 그걸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겠지. 그러던 어느 날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저녁에 채널을 돌리다가 보게 된 프로그램으로 영국의 한 아동 시설에 머물렀던 여러 아이를 일생에 걸쳐 관찰한 다큐멘터리였다. 긴 기간의 프로젝트로 상정하고 주요 나이대마다 인터뷰를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대략 예닐곱 살부터 10대, 20대 초반, 30대 중후반, 40대 초반을 거쳐 50대나 60대가 될 때까지 같은 주제의 질문이나 최근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연대기로 추적하면서 인터뷰 영상을 편집한 내용이었다. 흥미로웠다. 대부분은 꿈 많고 주제 의식이 분명한 10대 후반, 20대 초반까지의 삶을 보내다가 30대 후반에 가장 격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결혼 실패, 내가 살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맞춰 나가는 문제, 경제적인 상황,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든 것과 경력 단절, 때로는 현재 삶에 대한 염세로 점철된 인터뷰가 30대 후반에 집중되었다.


20대의 고고한 이상은 먹고사는 문제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고 배우자나 애인, 아이들과 맞춰나가면서 때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신경 쇠약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남일 같지 않아 멍하니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러다 같은 사람들이 40대 초반을 넘어가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생에 대한 고찰이 30대보다는 더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적응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흐름을 받아들였다고 봐야 할까.


물론 몇 년 전 그들이 겪은 갈등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때로는 이혼을 하고 결별을 하고 경제적으로 나아진 바가 없어 보였지만 몇 년 전에 비해 대부분은 체념했거나 편안해 보였다. 이상하게 나도 그냥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이 시기도 그냥 지나갈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묘하게 힐링이 되었다.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책 <아, 단단히끼였다>(2020,책밥)중에서



책 <아, 단단히끼였다>(2020,책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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