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아, 단단히 끼였다>(2020, 책밥) 중에서
이전 시대의 미덕 중 하나는 ‘질문하지 않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부터 질문은 많이 하지 않았다. 대학교 강의 시간에도 질문은 늘 마지막에 부록처럼 ‘혹시 질문 있나?’ 수준의 비중이었고 회사에 와서 상사의 말에 질문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말을 다 이해하고 대립하지 않겠다는 수준의 용례로 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는 동기들은 늘 상사들의 뒷담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쟤는 질문이 너무 많아.”
지금도 가끔 어느 화장실에서 나이 든 선배가 뒷담화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잘 모르는데 알려줘야 하는 귀찮은 과정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렇다. 방금처럼 직원들에게 뭔가를 취합했거나 과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했던 일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이후 상황을 공유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뭔가 틀어진 것이겠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게 실현될 확률이 낮은 게임이었거나. 그럴 때도 역시 선배들은 질문이 없었다. 그냥 추정하는 식으로 상황을 넘긴다. 이유 없는 침묵과 거절, 반려도 그런 것이다. 회사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그냥 그럴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유가 없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나를 포함한 후배들 사이에서는 만연한 의식이다. ‘Why’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일 시작이 안 되는 친구들이다. 하지만 회사는 거기에 관심이 없다. 과거처럼 그냥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을 못 하는 이유는 보안상의 문제 정도로 가볍게 넘어간다. 아직도 질문이 어색한 회사가 너무 많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회사에서 다른 기업들처럼 곧 재택근무를 시작할 줄 알았다. 하지만 출근길 지하철이 널널해져 자리에 앉아 출근하는 게 당연해질 때까지 회사는 결정이나 과정의 공유를 한 번도 직원들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느 날 내일부터 집에서 일하라는 통보. 물론 회사 출근보다는 집에서 일하는 게 좋지만 과정에 대한 공유가 없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썩 개운치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재택근무나 유연 근무제도 갑자기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물론 이 책을 쓰는 지금도 코로나19는 여전히 많은 수의 신규 확진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논의도 없이 정말 중요한 결정은 회사 마음대로 끊어버린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리들이 막히면서 솔직하고 열정적인 후배들은 금방 여기서 일할 동기를 잃어버린다.
직원들을 달래고 다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역할은 우리 몫이다. 3말 4초, 30대 끝에서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직원들. ‘왜 회사는, 선배들은 이런 과정을 오픈하지 못할까’ 하고 고민하기보다는 당장 하루하루 마감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직원들을 달래는 나 같은 힘든 사람들 말이다. 권한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게 몇 푼의 복리후생비일 수도 있고 일부 평가 비중에 반영할 수 있는 역할이어도 괜찮다. 아니면 팀별로 조직별로 다른 문화를 만들었을 때 위에서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좋다.
너무 다른 세계의 두 세대 사이에서 권한마저 없는 상황이면 우리는 사이에 끼였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몰 입과 함께 요즘 많이 나오는 단어인 ‘자율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말이지만, 특히 우리 세대의 회사 생활에 더욱 필요한 말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