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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02. 2015

매력에 관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우리 안에는 그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 생긴다. 요컨대, ’이미지’는 심상을 내포한다. 그러니 누군가의 외모에 호감이 간다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닌 개인의 내적 기준에 따라 그 외모가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고, 그 심상이 자신에게 유쾌함을 선사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인간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고 ‘해석’의 과정을 거쳐 의미화한 것만을 지각하거나 인지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결국 우리가 타인을 본다는 건 사실 그가 나에게 갖는 의미, 혹은 그 타인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본다는 뜻이다. ‘매력’이라는 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타인의 마음에 유쾌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의 총칭이라면 결국 그 말 자체는 객관화되고 측량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매’라는 한자엔 도깨비라는 의미가 있다. 도깨비의 장난으로밖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을 끄는 힘. 그것이 ‘매력’이다.

 

그러니 “‘매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타인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요소엔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에 고민을 해보면 그 답은 정말 다양해서 쉽게 일반화되고 법칙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만 공리주의식으로 ‘최대 다수에게 최대 유쾌함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해 볼 만할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런 능력을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이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고민하는 방법으로 고찰해보려고 한다. 그러니 나는 저 질문을 다시 ‘무엇으로 인해 우리 안에 유쾌한 심상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겠다는 말이다. 장난과 폭력의 기준을 정의할 때 그 정도에 관해 고민하기 보단 상대적인 관점에서 당사자가 폭력으로 느끼는 순간부터 폭력이 된다고 정의하는 편이 빠른 것과 같은 논리다. 이렇게 보면 나는 다시금 매력이라는 것이 일반화되거나 측량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를 재확인하고 있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엔 여러 가지가 있다. 저마다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의 카테고리가 있다. 누군가는 음반을 수집하거나 필기구를 수집하고, 어떤 이는 모자를 수집한다. 우리가 사물을 쉽게 욕망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면된다. 그리고 그것을 구입한 그 순간부터 그것은 나의 소유가 된다. 화폐를 통한 소비 욕구의 충족, 소비를 통한 소유 욕망의 충족, 그 환상.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뽕”이 아닌가. 말하자면 우리는 욕구나 욕망이 충족될 때 유쾌해진다. 비록 욕구와 달리 욕망이 끝없는 결핍을 전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유쾌함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 유쾌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이 아닌 사람을 욕망할 땐 어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이것은 사랑이라는 행위에 깔려있는 욕망이다.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매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무엇으로 인해 우리 안에 유쾌한 심상이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답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소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가진다는 것. 그것은 나와 가까이에 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쾌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가까이에 두고 자주 봄으로써 나와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과 닮은 형상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고 그 모습에 ‘심히 기뻐’했듯, 우리는 나라는 주체 밖에 있는 모든 타자들 중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하며 기뻐한다. 서두에서 사람은 타인을 본다는 것은 곧 타인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 혹은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보는 것이라 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회적인 이유는 우리가 타자와 자신을 변별시키는 작업을 통해서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학용어를 사용해 우리의 몸을 이해할 수 있듯, 타인을 사용해 우리의 자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욕망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소유욕이란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타자를 찾아 곁에 두고 그것에 몰입함으로써 그와 자신과의 차이점을 느끼고, 그것을 느낌으로써 자신만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시 매력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타인에게 매력을 느끼는 보편적인 이유는 그에게서 소유의 가능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을 느꼈다는 말이 아니다. 매력을 느꼈다는 것은 그에게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느꼈고, 그에게 몰입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는 가능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일차적으로 이해하면 결국 매력적인 사람이란 ‘쉬운 사람’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을 쉽게 여는 것이 매력의 필요 충분 조건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착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인에게서 자신과의 차이점과 그에게 몰입할 가능성을 느꼈다는 것이 그가 정말 다르고 그가 쉽게 자신 곁에 있을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섹시하다는 말을  불편해하는데 그 이유는 어떤 여성의 자태가 노골적으로 성적이어서 그 여성과의 섹스를 연상한다고 해도, 그 여성이 정말 쉽게 남자들과 섹스를 즐기는 여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력의 필요 충분 조건은 타인으로 하여금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매력의 관한 논의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매력의 정의를 매력적인 사람이 아닌 매력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찾는다고 해도 그 경우의 수가 측량 가능한 수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와 자신의 차이점을 일일이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고,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계산적으로 꾸준히 어필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무엇보다 가능성을 가능성인 상태로 유지하며 관계의 선을 의식적으로 지키기는 쉽지 않다. 여전히 매력을 일반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엔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개인의 경험에 따라 만들어져 내재하고 있는 가치 판단의 함수를 타인이 어떻게 알고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겠는가. 

 

매력은 ‘관찰’되는 것이 아닌 ‘고찰’되는 것이다. 관찰된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 성격 등이 해석되어 정보화되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 판단에 의해 의미화되었을 때 매력은 정의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은 타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주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었을 때 건강하게 이뤄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타인의 ‘함수’를 이용하려 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자신의 ‘함수’를 바로 아는 일이 아닐까 한다. 남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남의 매력을 쉽게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소리’를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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