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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02. 2015

비긴 어게인

관계의 씨앗, 교감

 

사랑은 정말 쉬운 감정이다. 아니, 사람은 정말 쉽게 사랑에 빠지는 존재다. 태평성대든, 아수라장이든 그 안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절망 속에서도 사랑이 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얼마나 많은 예술이 그런 사랑을 그려왔는가. 그래서 그런지 우리에겐 삶 속에서 생기는 새롭고 다양한 관계를 단순히 사랑이라 표 현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사랑은 참으로 다양한 의미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넓 은 의미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곤 한다.

 

정말 넓은 의미의 사랑이란 표현이 허용된다면 『비긴 어게인』은 사랑 영화다. 하지만 여기서의 사랑은 내 가 비긴 어게인이 사랑 영화라는 걸 인정했을 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거의 모든 관계를 사랑이라 부르려 할 때의 사랑이다. 내가 연예인을 사랑한다 말하고, 내 친구에 게 사랑한다 말하고, 아끼는 물건을 사랑한다 말하고, 자주 가는 카페를 사랑한다 말할 때의 사랑이다. 『비 긴 어게인』이 그런 사랑 영화라면 비긴 어게인만을 보고 감동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얻은 감동은 댄과 그레타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서 비롯되어 얻은 비장미가 아니었다. 내게 있어 이 영화는 멜로 드라마가 아니었다. 감독의 전작 원스에서도 그랬고 감독은 영화에서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교감을 사랑의 씨앗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감정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교감은 모든 관계의 씨앗 이기 때문이다. 『비긴 어게인』이 남녀가 만나 교감했기 때문에 사랑 이야기라 한다면 역시 그것은 영화에 대한 평가절하다. 영화의 서술자는 둘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명명하지 않았다. 둘의 감정선은 항상 모호했 으며 결말에 가서도 정의 내릴 수 있을 만큼 명확해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의 관계가 우정이었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우정과 사랑은 관계에 대한 정의들 중 하  나일 뿐이다. 하지만 댄과 그레타의 관계는 감정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의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이 관계를 정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둘의 관계를 열린 결말로 두었다는 뜻이 아니다. 둘은 교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이 사랑에 빠지거나 친구로 남기로 ‘정리했다.’라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비긴 어게인』: 내몰린 이들의 힐링 여행

 

여기 삶이 내몰린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친구와 음반업계를 선도하던 제작자였으나 점점 상업논리에 지 배 되는 유행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동업자에 의해 축출당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명은 음악적 동지 인 연인의 성공으로 함께 대도시에 입성했으나 대스타가 된 연인의 외도로 갈 곳을 잃게 된다. 『비긴 어게 인』은 휘청대는 이 두 사람이 조우하며 시작된다. 두 사람이 만난 시점은 절묘하게도, 두 사람이 결국 자 신의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댄에겐 지하철에 몸을 던지려고 마음먹은 날이었고, 그레타에겐 뉴욕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날이었다. 둘의 만남이 얼마나 벼랑 끝에 몰린 상태에서의 만남이었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두 번의 플래시백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 둘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그 날 그곳에서 만났는가를 일일이 설명한다.

 

그 만남을 시작으로 둘은 성공을 향해 의기투합한다. 그레타에겐 재능이 있었고 댄에겐 그 재능을 꽃피워 줄 감각이 있었다. 둘은 잘 맞는 짝꿍이었다. 결국 영화의 내용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상대가 가지지 못한 것을 채워주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아픔이 드러나고, 그 흉터에 마음 아파하며 자신이  치유해줄 수 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처럼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낯선 남 녀가 교감을 나누다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긴 어게인』은 삶이 내몰린 이들이 만나, 함께 잃 어버렸던 이상을 되찾고 그로 인해 내몰렸던 삶을 되찾는 이야기다.


사랑의 은유인가 추억의 상관물인가: 분배기

 

그레타는 자신이 댄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나와 댄과 그레타가 다투는 장면은 댄과 가까 워진 것을 댄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계기로 댄과 그레타는 한층 더 가까워 지고 서로의 속마음을 솔직히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그레타는 댄의 차 안에 걸려있는 분배기를 발 견한다. 그것은 댄이 전 아내와 연인 시절 함께 음악을 들을 때 썼던 것이었고, 사연을 묻는 그레타에게 댄 은 아내 미리암과 첫 데이트 때 아무런 말도 없이 하루 종일 음악만 들고 도시를 돌아다녔던 이야기를 해 준다.

 

그 뒤로 댄과 그레타는 분배기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뉴욕 도시를 돌아다닌다. 마치 댄이 미리암과 그랬 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미리암과의 연애를 재현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분배기 또한 댄의 사랑을 의미하지 않다. 분배기는 댄과 미리암 사랑 보단 댄의 음악을 향한 사랑을 의미하는 게 더 크다. 댄과 미리암이 ‘밤새도록 서로 아무  말없이’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 분배기에 얽힌 사연이었 다. 당시 댄과 미리암은 음악에 미쳐있던 청년들이었다. 분배기를 통해 나눴던 댄과 미리암의 교감은 연 인 간의 사랑보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로서의 애정의 성격이 짙다. 댄과 그레타가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도 댄은 이 순간이 진주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가 음악이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음악의 힘을 예찬한다. 다만, 내가 내 논리를 위해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은, 그 순간이 지금 댄과 교감 하고 있는 상대와 함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순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미묘한 차이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앨범이 완성되고 댄과 그 레타의 음악 여정은 끝이 났다. 이제 각자의 갈 길을 고민하는 시점에서 그레타는 댄에게 받았던  분배기를 돌려준다. 나는 이 장면이 댄의 마음을 그레타가 거부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에 대해 ‘그것은 낭만적 인 해석이 아닌 야만적인 해석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분배기는 앞서 말했듯 댄의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댄이 그레타에게 분배기를 준 것은 사랑고백의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음악적 열정이 그레 타에게 향해 있음을 알려주는 행위였다. 둘의 여행은 끝이 났고 그레타가 댄의 열정을 돌려주는 것은 자 연스러운 일이었으며 댄에게 상처 입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원래 댄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분배기의 의미는 더 뒤로 가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레타가 데이브의 콘서트를 나온 뒤 댄과 미리암이 벤 치에 앉아 첫 데이트  때처럼 분배기를 통해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내 미리암이 자신의 헤드폰을 빼고 댄의 한 쪽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곤 자신의 귀에 꽂고는 댄과 키스를 나눈다. 이것이야 말로 댄과 미리암의 사랑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분배기가 사랑이 아닌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 키는 상관물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그녀가 있었다: 바이올렛

 

영화의 하이라이트중 하나로 엠파이어 스테이트가 보이는 빌딩 옥상에서의 마지막 앨범 연주 장면이 있 다. 그레타는 녹음에 앞서 기타를 연주할 줄 안다는 바이올렛에게 그날 와서 기타 연주를 해달라며  그녀를 초대한다. 그녀의 엄마, 댄의 아내인 미리암까지. 만약 댄과 그레타의 관계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관 계였다면 그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동안 놓았던 베이스를 메고 딸과 열정적으로 협연을 하는 댄, 그 모습을 한쪽에 앉아 흐뭇하게 쳐다보는 미리암, 바이올렛의 기타 음량을 높여주며 뿌듯해하는 그 레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중반에 댄과 그레타가 다퉜던 것도 바이올렛을 걱정하는 그레타가 댄에게 아빠의 역할을 해주라며 댄의 상처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레타가 바이올렛을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사랑스러운 소녀인 것도 있었지 만 그녀가 댄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댄과 그레타의 관계를 그저 “썸”타는 관 계 정도로 이해해 버리면 이런 지극함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 둘이 음악적 동지로서 서로의 아픔을 승 화시키길 바랐기에 그런 하이라이트가 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우리가 분명히 그 존재를 느끼지만 아직 정의 내릴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를 나는 초언어 적인 것이라 부르고 싶다. 대자연을 목도한 뒤에 나오는 경탄, 그토록 바랐던 일을 이루고 난 뒤의 성취감 등등 그것들은 주로 감정이 언어보다 앞서는 것이고 오히려 언어로 표현할 때 그 감정이 죽어버리는 것들 이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초언어적으로 섬세한 감정들이 존재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시켜 표현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죽여버리는 일이다. 댄과 그레타가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은 사랑도, 우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평적 차막원에서의 ‘사 랑과 우정 사이’도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그레타의 앨범이 완성되고 댄의 레이 블과 협상을 하던 날 회사를 나와서 둘이 작별인사를 하던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표정을 보면 자신 들조차 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 감정에 관객인 우리가 이름 붙이는 일이 적절한 일일까?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는 태도가 모 든 것을 말하려 하는 태도보다 숭고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을 압도하는 것에 경외를 표하는 태도 말이다. 둘의 감정이 사랑이었고 이루어지지 못한 채 사랑의 씁쓸함을 남겼는가? 아 니다. 댄과 그레타의 교감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된 채 인물들 모두에 게, 그리고 나에게 각인됐다. 음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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