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생흔

손원평의 『튜브』를 읽고

by 여온

3월의 처방책, 손원평 작가의 『튜브』를 읽었다. 『아몬드』의 작가라던데 읽은 적 없다. 읽고 많이 울었다는 감상평이 많았다는 것만 기억한다. 3월의 책처방 상담에서 나는 요즘 취미가 많이 생겨 주말이 되면 여러 활동들을 하는데 한편으론 본업이 마음에 걸려 ‘내가 지금 이런 걸 즐기고 있을 땐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고민을 말씀드렸다. 대표님은 이 책을 통해 내가 나 스스로오게 지금도 잘 해오고 있다는 위로를 건낼 수 있길 바란다고 하셨다.


주인공인 김성곤이 자살시도를 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은 두 번째 자살시도인데, 첫 번째 시도를 하고 나서 이 두 번째 시도를 하기까지 겪었던 좌절과 회복의 시도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굉장히 단순한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그래서 더 줄거리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실패와 성공.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이야기. 김성곤만 보자면 굴곡진 인생의 한 파장에 불과한 서사다. 소설적 재미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독자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큰 어느 소설작가가 편지 대신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쓴 우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말에서도 작가가 밝혔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하는 이야기를 추천해 달라는 포털 질문글에 아무런 답변이 없는 것을 보고 쓰기로 결심한 이야기였다고. 나처럼 위로 받는 것에 자기 검열이 심한 사람에게는 따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뭔가를 좋게 바꾸려는 김성곤 안드레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그 고군분투가 따분하게 느껴진다면 그냥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된다. 사실 세상엔 그런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9p


김성곤의 이야기에서 느낄 만한 것은 없었다. 아내인 란희의 비난처럼 김성곤의 변화는 바뀐 환경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그 근본적인 각성이 아니었다. 김성곤의 설레발에 아내와 딸까지 휘말려 다시 고통 받는 것을 보는 게 불편했다.


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건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 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난 당신이 그걸 해낸 줄 알고 응원했어. 진심으로 노력해서 결국 바뀌었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신은 허영에 빠져 자만한 거였고 나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착각한 것뿐이었어. 잠깐은 모든 게 잘돼간다고 생각했겠지. 상황 좋고 기분 좋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쉬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바쁘고 여유 없고 잘 안 풀리니까, 당신은 바로 예전의 당신으로 되돌아갔지. 그러니까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은 거야. 넌 끝까지 그냥 원래의 너 자신일 뿐이라고. 252p


어느 날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건너편에서 하원하는 아이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운전기사 박실영을 발견하는데, 이 박실영이라는 노인의 대사가 감명 깊었다.


난 정말 많은 일을 겪었어요. 아주 길고 오랜 시간 동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떠올리기 싫을 만큼 추악하고 몸이 떨릴 만큼 황홀한 일들을 말이죠. 그 시간 동안 난 내 모든 감정을 다 써서 반응했어요. 최선을 다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요. 달리 말하면, 당신과 똑같이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지금 이 모습으로. 259p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것은 나의 경험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경험에 대한 나의 반응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땠더라. 대적하듯 싸웠던가, 재해를 만난 듯 피하기 바빴던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무한 긍정하며 인공 천국을 만들지도 않았고 무한 비관하며 인공 지옥에 처하지도 않았다. 아니다 인공 지옥 비슷한 건 만든 적이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반응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대표님께 털어놨던 고민과 결부지어 본다면, 지금 내가 본업에 충실하고 본업에 유능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욕망을 돌보는 여가시간을 필요로 하는 모순도 내가 겪은 시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 시간들에 대한 반응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모든 가용시간을 불태워 본업의 연료로 삼아서는 행복해질 수 없고, 일을 생활과 분리해 오직 생활수단으로 일에 임해서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나는 커리어 패스 상 멀리 가지 못할 것이고, 취미에 빠지는 족족 어느 정도의 성취에만 만족하고 다른 취미를 찾아 떠날 것이란 예감이 있다. 나는 이런 나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런 나에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풍경은 기대할 만한 것일까, 걱정할 만한 것일까. 아직은 알 길이 없다.


남자가 실패와 성공을 오간 복잡하고 두서없는 삶을 겪어 오늘에 이른 것을 당신은 모른다. 여러 차례 죽기로 결심하고 죽으려 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죽음에게 먼저 손 내밀지 않기로 한 것도 당신은 알 턱이 없다. 그에게 뒤늦게 운전을 배워 미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한 멋진 친구와, 젊고 재능 있는 뮤지션 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다. 그의 가슴에 매일매일 새로운 꿈과 계획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도, 오늘도 그가 그것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당신은 영원히 알 길이 없을 것이다.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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