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너무 자주 말해서 이젠 실제 아니어도 내가 그렇게 믿고 있는 수준 같은데, 기획자이지만 기획자의 업무 중 ‘기획’을 제일 못한다는 컴플렉스가 있다. 정확히는 홈페이지를 기획할 때의 첫 단계. 홈페이지의 컨셉을 정의하고 컨셉에 어울리는 핵심 크리에이티브를 기획하는 일이 어렵다. 첫 산출물인 메인페이지의 화면설계서에 이를 표현하는데, 몇 년을 일하고 있어도 이 메인 화면설계서에선 숨이 턱턱 막힌다. 무엇보다 후임들에게 볼 낯이 없다. 어느덧 두 명의 팀원이 생겨 어엿한 ‘팀’으로 부를 수 있게 됐는데, 후임들이 검토해 달라면서 화면설계서를 보내오고, 내 딴에 검토하고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실장님께 올리면 후임들이 내 앞에서 실장님한테 신랄하게 혼이 난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지적 받으며, 내가 제시하지 못했던 개선점을 피드백 받으며.
그런 와중 주말엔 꾸준히 책을 읽으려 했고 읽을 때마다 ‘내가 지금 책 읽을 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본업에 충실해 인정받았기 때문인데, 본업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취미만 즐기다 보면 여가를 즐길 수 있게 해준 원천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됐다. 그래서 2월 책처방을 받으면서는 업무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을 처방받길 원했다. 그래서 받은 책이 『에디토리얼 씽킹』이었다.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보와 대상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도출하고, 그것을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편집하고 구조화하는 일련의 사고방식. 26p
한 때 ‘디자인 씽킹’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모델을 빠르게 프로토타이핑하고 피드백을 거쳐 프로토타입을 정교하게 개선해 솔루션을 완성하는 방법론이다. 에디토리얼 씽킹도 잡지 편집자로 오래 일했던 저자가 본인의 업무 노하우를 설명한 내용이긴 하지만 넓게 보면 ‘편집’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기획 방법론이다. 내 업무인 웹 기획에 적용할 만한 부분을 찾으며 꼼꼼히 읽었다.
지난 20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하고, 뒤죽박죽 난장판 같은 사건과 사실이 끊임없이 들이닥친다. 그것을 소음이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 선택지도 있고, 의미로 승화해서 다른 현실을 사는 선택지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며 살고 싶은가? 새하얀 프릴 원피스를 입고 세 살 터울 언니의 유일한 청자로 훈련받은 그 시절부터 나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18p
저자는 자료수집, 연상, 범주화, 관계와 간격, 레퍼런스, 컨셉, 요점, 프레임, 객관성과 주관성, 생략, 질문, 시각재료의라는 12가지 개념으로 에디토리얼 씽킹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기획을 하며 실천하고 있던 개념도 있었고 중요성을 알지만 잘 하지 못하는 부분, 아예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이를 테면 기획을 하며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자리에서 회의실에 있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기획 주제에 대한 마인드맵을 그리거나 자유롭게 연상되는 키워들을 나열하며 공통점이나 활용할 수 있는 키워드를 선별한다. 학생 시절 팀플을 하며 그런식으로 회의를 했던 게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료수집이나 레퍼런스 선정은 기획을 하며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서는 이 레퍼런스를 통해 어떤 방면에서 힌트를 얻으려 하는지를 먼저 수립해 놔야 하는데, 프로젝트의 첫 임무로 레퍼런스를 찾을 때 전략을 찾으려 레퍼런스를 찾는 건데 전략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는 모순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던지. 무작정 최근 오픈한 사이트를 찾지 말고 충분한 사고 과정을 거쳐 고객사에게 어울리는 컨셉과 크리에이티브가 무엇일지를 정의하고 그것의 레퍼런스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눈에 보이는 실물을 보는 것이 더 생각을 잘 유도한다는 생각에 잘 지키지 못했던 규칙이다.
이제는 에디터로서 내가 파는 상품이 ‘특정 정보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주관적 판단’이라는 사실을 안다. 끝없이 펼쳐진 정보의 장에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경로는 수천수만 가지이다. 그중 내가 선택한 경로를 최대한 완성도 있게 조직해 사람들 앞에 내놓는다. 변수와 맥락으로 요동치는 이 세계에선 어제 통했던 방법이 오늘 통하지 않을 수 있다.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게을러질 수 없다. 20년을 해도 이 일이 지겹지 않은 이유다. 176p
‘객관성과 주관성’ 에 대한 생각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객관적인 생각이란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진 고도의 주관적 생각이라는 점. 주니어 시절 ‘기획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내 기획서에 신랄할 비판을 하던 실장님에 대해 참 양면적인 꼰대라며 이를 갈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오랜 경험을 통해 기획의 어떤 방향이 더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문서만 보고도 아시던 거였다. 나에겐 그 시야가 없어 서두에 밝혔던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고.
이 책은 3월에 다 읽었고 독후감 쓰는 게 늦었다. 그 사이 회사 홈페이지를 리뉴얼하는 일로 후임들은 오랜 동안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미 실장님의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는 상황에서 나까지 의견을 보태진 못하고 대신 플랜B로 혼자 B타입 화면설계서를 작성해뒀다. 본업에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아직은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