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생흔

조우리의 『사서 고생』을 읽고

by 여온

한 달에 책 2권 읽고 감상문 쓰기를 지켜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없어서 4월 책처방 상담날 대표님께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는지 여쭤봤고 이 책을 추천 받았다. 단편소설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본문이 아닌 작가의 말을 소개하시며 이 책을 추천해 주셨다.


우리는 만났기 때문에 헤어질 것이다. 살아가기 때문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지만 헤어진다고 해서 만났던 사실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리를 바꾸기 때문에 어쩌면 누구도 사라지지 않는다. 78쪽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는 진행시키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여서 그의 서사를 추적하고 헤아리는 것으로 내 세계가 변화하는 이야기. 내 삶의 주인공은 나지만 이 세계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일까. 그렇다고 영웅담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경험으로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다. 인터뷰어라도 된 듯 가벼운 술자리에서 인생을 유출시켜야 하는 질문을 했다가 “이런 자리에서 가볍게 할 만한 얘기가 아니어서 질문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은 10년 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흉져있다.


주인공 영지는 사서가 되기 위해 문헌정보학과를 나왔지만 왜 사서가 되고 싶었는지에 대한 목적의식은 없던 인물이다. 반면 본인에게 미러라클 동그라미도서관의 명예 관장직을 인수인계하고 퇴사한 이정아는 “러시아 현지에 파견 근무를 다녀올 정도로 유능”한 무역 회사 직원이었지만 돌연 사서가 되기 위해 사서교육원에서 준사서자격증을 딴 인물이다. 감정적으로는 방황했어도 지름길을 갔던 영지가 먼 길을 돌아 도서관에 계약직으로 취업해 정직원들이 귀찮아 하는 일을 도맡아 하던 정아씨에게 가졌을 시선은 쉽게 상상이 된다.


이정아가 퇴사하고 난 뒤 영지는 미러라클 동그라미도서관에서 내보내졌어야 할 이정아의 아바타가 여전히 남아 자동응답을 하듯 본인의 채팅에 반응하는 현상을 발견한다. 난사람의 잔향. 이 역시 내가 좋아하는 테마다. 나는 난사람이기보단 든사람일 때가 많았고 든사람으로서 난사람들의 잔향을 맡을 때가 더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말’이 남았다. 그들이 왜 왔고, 왜 가는지에 대한 말.


[이번엔 이걸 하고 그다음엔 또 저걸 하고. 그렇게 오지 않은 날들만 준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바로 그 순간만 생각하면서 당장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어요. 이 책의 주인공처럼요.] 49쪽


존재할 수 없었던 이정아의 아바타 ‘동그리’에게 말을 걸며 영지는 몇 가지 법칙을 발견한다. 아바타를 ‘정아 쌤’이라 부르면 도서관 이용 수칙을 말하고 ‘동그리 님’이라 부르면 이정아가 멀티버스 도서관 속에서 진행하던 독서 모임에서 했던 말을 뱉는다는 것. 이정아는 동그라미도서관에서 ‘정아쌤’이기도 했고 ‘동그리 님’이기도 했다. 사실 이정아는 동료들에게 ‘정아 쌤’이 아닌 ‘정아씨’였다. 정아 쌤이었던 적이 없으니 정아 쌤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도서관 이용수칙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정아는 그 도서관에서 ‘동그리’이고 싶었을 것이다. 사서로서 방문자들과 책을 이어주는 존재. 찾아온 이의 필요를 책으로써 채워주는 존재.


“동그리 님 말이 맞았어요. 그 책 정말 재미있던데요. 딱 제가 찾던 책이에요.”
“그렇죠? 역시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이정아의 목소리가 저렇게 명랑했던가.
영지는 묵례를 하며 대출 창구를 지나쳤다.
이정아가 눈짓으로 인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62쪽


영지는 이정아가 없는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이정아의 잔향과 만난 존재였다. 영지는 이정아가 계약 연장 불가 통보를 받은 날 입사한 든사람. 영지는 앞으로 그 잔향을 보존하고 간직하며 서사로서 거듭날 수 있을까. ‘정아 쌤’을 떠올리며, 왜 대표님이 작가의 말로 이 책을 추천하셨는지 다 읽고 나서 이해됐다. “헤어진다고 해서 만났던 사실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리를 바꾸기 때문에 어쩌면 누구도 사라지지 않는다.”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있는 퍼블리싱팀 동료 소리씨가 팀 내 불화로 하루만에 퇴사를 했고, 며칠 전 우리팀 후임인 상훈씨가 면담으로 퇴사 의사를 밝혀왔다. 어쩌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앞에서는 그저 먹먹해진다. 그들이 남긴 것은 나에게 남겠지만 나에게 남은 것이 많아질수록 먹먹함도 짙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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