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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23. 2015

3. 영감에 대하여

영감에 대하여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네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보았다고 생각한 것은 꿈이었다
이야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것을 옮기는 와중에 
모두 녹아 없어져 버렸다

손가락 틈으로 기억이 뚝뚝
흔적 없는 기억은 모두 꿈이다
존재하지 않으니 무엇으로든 기억할 수 있다
무엇이든 남아있었다면
그것으로 시를 썼을 것이다

남은 자의 허무함에 중독되지 않기를
나의 시는 너를 승화시킨다
연기가 된 넌 나의 뇌를 녹이고
꿈을 꾸는 난 그럼에도 널 들이마신다
어쩌면 꿈에서 깬 지금이 다행이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는다
생각해 보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말 그런가 하고 마음을 확인해 보니
과연, 지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너의 시간
너를 생각하는 동안은 내 시가 내 것이 아니며
내 시간이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의 시간을 사로잡은 너를
나는 잠에 들어야 만날 수 있다
그만 돌려주고 네 자리로 가라하고 싶지만
이미 넌 한 번 나를 떠났기에
이젠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에 대하여', '~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시나 에세이를 쓸 때가 있었다. 이 때엔 사물의 속성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처음 '순이의 편지'를 쓸 때 왜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말이 '안녕'일까 하는 궁금증을 시로 풀어냈던 것처럼, 사물의 의미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많이 했다.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글을 쓰기 전에 나에게 던지는 첫번째 물음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나의 시를 쓰기 위한 수련단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나만의 시적 주제를 찾아 그것에 집중하기 전 여러 사물들에 궁금증을 갖고 그것이 나에게 갖는 의미를 모색한 시간이었으니까.

내용처럼 실제로 잠을 자다가 도중에 깨서 쓴 시다. 평소에 꿈을 꾸다가 깨면 얼른 머리맡에 있는 폰을 켜서 메모장에 꿈 내용을 옮겨적곤 했다. 그렇게 성공률이 높진 않았는데 이 날도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쉬웠다. 그러다 문득 영감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글로 나오지 않을 때, 어떤 자극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고 느끼긴 느끼는데 그것을 설명해 낼 수 없을 때의 답답함이 지금 내 느낌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 답답함은 '남은 자의 허무함'과 같다. 말하려는 나는 있는데 말하고자 했던 누군가가 사라진 허무함. 반대로 생각하면 나는 그를 무엇으로든 상상할 수 있다. 차라리 잘된 것이다.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 만큼 그것을 승화시키면 될 일이니 말이다. 일렁이는 액체를 부유하는 기체로 승화시키면 나는 그것을 마실 것이다. 그것이 나의 뇌를 녹이는 독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마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영감을 글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본래 영감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돼버린다고 해서 그 영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시 그 영감을 음미하고 싶어졌다. 눈을 감고 잠에 들어 꿈을 꾸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는 아직 영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네(4)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네(너의)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아직 영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영감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현실 감각을 버려야 한다. 잠에 들어야 한다. 영감을 만나면 나는 이제 그만 내 시간을 돌려달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갈구해왔기에, 남은 자의 허무함을 알기에 이젠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나는 그것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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