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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로라 May 15. 2024

맘껏 뛰놀며 자랄 수 있는 자유를

《개구쟁이 산복이》이문구. 창비, 1988.


지름길


학교 가는 지름길은 황토길

바람개비 돌아가는 바람길

굴렁쇠 굴리다가 밭을 밟고

어른한테 야단 맞는 좁은 길.


학교 가는 지름길은 진창길

가오리연 걸려 있는 안개길

도란도란 얘기하며 한눈 팔고

종소리에 달려가는 바쁜 길.





  선생님은  '아이'와 접미사 '-답다'가 합쳐진 말인 '아이답다'라는 말을 써보거나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답다' 앞에 명사가 사람일 경우에는 '~의 자격이 있다', '~의 신분이나 특성에 잘 어울린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해요.


"너 참 아이답구나."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만약에  말을 들은 아이는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해봅니다. 아마 "도대체 아이다운 것이 뭔데요?"라고 되묻지 않을까요? 아이로 태어났는데 아이답게 행동한다니요. '아이답다'를 '아이의 자격이 있다' ' 아이의 신분이나 특성에 잘 어울린다'라고 뜻을 풀어보니 더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전 요즘 아이들이 아이답게 살지 못하는 환경에서 지내는 것 같아 안쓰러워요. 동시에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하잖아요. 저는 그동안 동시를 읽을 때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고, 힘든 현실에서도 꿋꿋이 헤쳐나가는 아이화자에게 더 애정이 갔거든요. 그런데 불현듯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내가 어릴 때처럼 신나게 노는 아이를 동시에서 몇 명이나 만났나?' 하고요. 그러던 중 《개구쟁이 산복이》라는 동시집을 만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런 아이를 만났어요.

  위 시에는 학교로 가기 위해 지름길을 선택하는 아이가 나와요. 황토길에 진창길이라니....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요? 1연의 표현처럼 왜 멀쩡한 길을 놔두고 그 길로 가냐고 혼나겠죠. 비록 어른의 눈에는 "좁은 길"일지라도 아이의 눈에는 즐거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바람길", "안개길"로 보이는데 어쩌겠어요. 아이는 그 길에서 바람개비, 굴렁쇠, 가오리연과 함께 놀아요. 상상의 세계에서는 못할 것이 없잖아요. 놀이에 몰입하다 학교 종소리를 듣고 바삐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사랑스럽지 않나요?




삘기 뽑으러 가는 길


삘기 뽑으러 바삐 가는 논두렁길에

무슨 일이 있는지 심상치 않아

가던 걸음 멈추고 돌아다보니,

우렁이 기어 가는 도랑에 모여

송사리는 송사리끼리 수군거리고,

참개구리 건너뛴 물꼬 옆에서

올챙이는 올챙이끼리 수군거리네.


송사리가 물방개에 놀란 것일까

올챙이가 징거미에 놀란 것일까

가만가만 논배미를 두루 살피니

미꾸라지가 나타나 심술 부린 거야.

놀이터에 흙탕물 일으킨 거야.



 《개구쟁이 산복이》는 1988년도에 나온 동시집이에요. 그래서 해설에도 언급되었듯 그 시절 "소박한 시골 생활이나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소재"들이 동시집의 주를 이루고 있죠.  위 동시에서 '삘기'는 띠의 어린싹이라고 해요. 띠는 여러해살이 풀인데 띠꽃이 피기 전 아이들은 어린싹을 뽑아서 씹어서 먹었다고 해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시절 아이들에게 간식이 되어준 삘기가 지금까지 동시에서 살아남은 것도 참 소중하지만, 전 삘기를 뽑은 아이의 맑은 귀와 눈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교실에서 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드는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흔한 교실 하교 풍경이 되어버렸어요. 휴대폰 액정화면의 현란한 장면에 눈이 팔린 아이에겐 파란 하늘도,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도 보이지 않죠. 그럼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서 송사리와 올챙이의 수군거림과 미꾸라지의 심술을 알아차린 동시 속 화자의 아이다움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오디 따러 갔다가


들뽕나무 오디 익은 둠벙 가에 갔더니

갈대 글미자 휘어진 둠벙 한가득

흰구름이 겹겹이 차 있었어요.

미역 감고 물장구치던 그 둠벙이

하늘처럼 깊어져서 겁이 났어요.

애들이 노는 소리 들리다 말고

송사리랑 피라미도 보이다 말고

바람마저 잠들어 너무 조용해

오디가 쏟아져도 그냥 왔어요.

놀아도 따로 놀면 재미가 없고

먹을 것도 혼자서는 맛이 없다는 걸

오디 따러 가다가 깨달았어요.




  그 시절 아이가 되어 들뽕나무에 달린 오디를 따러가는 아이 뒤를 따라가며 상상해 봅니다. 먹을 것이 흔치 않던 시절 들과 숲에서 난 열매들은 좋은 군것질 거리었을 테니까요. 오디를 먹기 위해 아이는 들뽕나무가 있는 움푹 파여 물이 괴어 있는 둠벙가로 놀러 갑니다. 둠벙은 농사에 꼭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미역 감고 물장구 치"는 멋진 놀이터였겠죠. 그러나 설렘 가득 안고 찾아간 아이의 눈앞에는 같이 놀던 아이들도 없고, 송사리와 피라미도 보이지 않고, 바람마저 불지 않는 조용한 웅덩이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네요. 익숙한 곳에서 낯섦의 순간을 마주한 아이의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놀아도 따로 놀면 재미가 없고/ 먹을 것도 혼자서는 맛이 없다는 걸/ 오디 따러 가다가 깨달았어요."라는 아이의 말이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도 유효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맛있는 오디라도 같이 웃으며 놀 친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전 올해 3학년을 맡고 있어요. 급식을 먹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대화 중 하나가 "너 학원 몇 개 다녀?" 에요. 서로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말이죠. 어제는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선생님 오늘은 좋은 날이에요. 왜인지 아세요? 학원이 두 개 밖에 없거든요." 이런 말을 하는 아이에게 전 "그래, 오늘 많이 놀아. 많이 놀아야 돼."라는 말밖에 건넬 수 없네요. 아이들이 <개구쟁이 산복이>처럼 학원 없이 자연에서 맘껏 뛰놀 수 있는 날이 꼭 돌아오기를 바라봅니다. 아이다움은 놀이에서 시작되는 거니까요.

  


 

개구쟁이 산복이



이마에 땀방울

               송알송알

손에는 땟국이

               반질반질

맨발에 흙먼지

              얼룩덜룩

봄볕에 그을려

              가무잡잡

멍멍이가 보고

              엉아야 하겠네

까마귀가 보고

               아찌야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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