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P가 세우는 여행 계획

계획은 계획일 뿐, 유쾌한 호구가 되기로 했다

by 김볕

포르투갈 비행기 티켓은 작년 5월에 끊었다. (1화 참고) 나만 믿으라고 했다. 미리미리 계획을 세우리라-유럽 여행 다녀온 지인들이 그러하였기에-다짐했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다.


숫자에 약하다보니 날짜와 시간 감각도 부족한 건 당연한 이치. 이번엔 특별히 평소 여행보다 얇으면서도 많이 쓸 수 있는 A5 공책 한 권을 준비했다. (평소엔 손바닥 만한 수첩을 하나 챙겨서 일정이나 감상을 조금씩 남긴다.결국 마지막엔 흐지부지 되는게 내 스타일이긴하다. )

한창 썼던 호이안 수첩과 다이소 노트

그렇지만 이번 만큼은 매번 휴대폰 어플을 뒤지며 확인하는 번거로움도 줄이고 남편을 향한 무의식적인 방어를 위해서도 무기가 필요했다. 쉽게 말해 남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증거물 수집 정도가 되겠다.


비행기 표 예매 후 한참 시간이 지난 늦가을 한적한 주말 오후, 준비한 공책과 여행 책자를 챙겨 남편과 카페에 앉았다. 비행기 이착륙 정보와 예약한 숙소의 주소와 특징을 적으면서 계속 남편에게 여보, 이 날짜 맞나. 여보,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걸리네. 여보, 얼마에 표를 끊었지.를 물어대면서 여보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만큼은 여보여보여보, 오빠오빠오빠를 불러대는 나의 모습이 왜이리 한심한지. (숙소 예약 썰은 따로 풀만큼 사연이 길다.)


가끔 남편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째려보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난 무지 소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그 이후에도 두세 번 더 있었다. 그때마다 난 투지에 불타다가도 금세 불쌍한 눈빛이 되었는데, 이날은 어쨌든 좀 더 밝고, 명랑하고, 희망에 찬 눈빛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렇게 완성한 첫장을 넘기고 두 번째 장에는 리스본과 포르투로 이동할 때 필요한 기차 예약 정보와 환전한 돈에 대한 것들을 썼다. (포르투 기차 예약 관련해서 왠만한 블로그 글을 다 읽었는데 이 분 글이 제일 도움이 많이 되었으니, 혹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옆을 클릭하시길. https://blog.naver.com/jye9432/223654603961 )


새로 생긴 동네 맥도날드에 앉아서 포르투갈 일정을 짜려고 계획한 날. 노트 세 번째 장에는 교통편을 정리할 작정이었다. 너무 먹고 싶었던, 추억의 상하이 스파이시 버거를 시켜놓고는 남편과 둘이 앉아 기분 좋게 대화를 시작했는데, 대화의 끝엔 내가 굉장히 슬픈 눈을 하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좀 더 싸게, 그리고 좀 더 편하게 이동을 하려면 미리 표를 끊거나 일정에 적합한 교통 방법을 결정해야 하는데, 여행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간단한 일정조차 준비하지 못했고, 또 리스본에서 탈 수 있는 교통편이 생각보다 너무 다양하다는 것.(현지에 가보니 막상 책에 나온 설명보단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리스본 근교 도시 이동이라는 큰 산을 마주하니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내가 결정할 것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건지, 방법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아마 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여행가기 전 검색을 하다보면 넘치는 정보에 질식되는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 이후 포르투갈 교통과 관련된 글을 볼 때면 울렁증 비슷한 증세로 검색을 몇 번 포기했다. 타고난 계획형이 아닌 나에겐 요즘 같이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선 뭘 해도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남편에게 그냥 우버 부르면 어디든 간다. 돈 좀 더 쓰면 되지. 라는, 도움을 주겠다는 건지 부담을 주겠다는 건지 헷갈리는 말을 듣고 이 페이지는 나의 능력 밖의 영역임을 인정했다.결국 여행책보다 훨씬 부실한 정보만 옮겨 적고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여행 일주일 전, 이젠 꼼짝없이 준비해야 하는 상황. 나 이번 여행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때 그때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갈거야. 라는 선언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었는지. 포르투갈이 한적한 동네 마실도 아닌데 말이다. 뭘 알고는 있어야 어디든 갈 것 아닌가. 그래서 네 번째 장부터는 최소한의 여기는 놓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꼭 가봐야할 곳 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다.


우선은 리스본 내에 있는 곳

1. 제로니무스 수도원 - 꽃보다 할배에 나왔다는데, 여행 책자에 있는 사진을 보니 멋있어 보였고. 유네스코 문화 유산이니까!

2. 에그타르트 원조 가게, 파스텔 데 나타 - 여기를 가지 않고 돌아온다는 건 대전에 놀러가서는 성심당에 들리지 않는 것.

3. 벨렝 탑. 테주 강가 위치했는데 사진을 보니 뭔가 있어 보였다.

4. 상조르즈 성 -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 전망대에서 석양을 봐야하기에. 타일러도 세계테마기행에서 방문한 장소.

5.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다 볼 수 있는 전망대.

6.국립 판테온 - 포르투갈 위인을 모신 곳. 화요일과 토요일 벼룩시장이 열려서 날짜가 맞다면 방문해보고 싶었다.

7. 국립 고대 미술관 - 뒤러의 작품들이 있다고도 하는데,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그곳 미술관 혹은 박물관 하나는 가보자는 마음으로.


그 나라의 문화나 유명한 관광지, 먹을거리 같은 굵직굵직한 정보들은 여행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첫 일본 여행 이후 두 번째 여행인 2010년 떠난 상해와 2013년 아이와 처음 떠난 오키나와도 모두 책으로 준비했는데, 여행 후 너덜너덜해진 책을 보면 참 치열하게 돌아다녔구나 싶다. 그 당시엔 여행 블로그가 지금처럼 엄-청 많지 않았으니까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여행책자를 전과를 보듯 찬찬히 여러 번 읽다 보면 하나씩 떠오르는 곳이 있다. 거기에 쓰여진 관광 명소의 명칭과 사진, 지도에 집중하다보면 말이다. 그 중 몇 개를 내 마음에 품으면 된다. 이렇게 해도 결국 다 못간다.


요즘은 여행 블로거(유튜버)가 많아지면서 책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은 자신의 여행 일기 성격을 띄는데 나 같은 경우는 안 좋은 후기에 금세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시시콜콜한 그들의 감정까지 들어주다보면 지쳐버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여행책자에 기댄다. 마치 담백하고도 정갈하게 차려진 한정식을 놓고 내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천천히 먹을 수 있는 기분이랄까. 이에 비해 인터넷 검색은 북적북적한 푸트코트 같다. 많이 줄 줄을 서있는 곳은 어디인지, 누가 뭘 먹는지, 뭘 시키는지 기웃거리 듯 정보를 탐색해야하는 점이 나랑은 참 맞지 않다. 그래서 난 장소를 정한 이후 블로그의 글을 보며 작은 팁들을 참고하는 편이다.


이렇게 나의 여행 계획은 리스본에서 끝났다.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포르투를 미쳐 알아보기도 전에 떠날 날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행 전 날 우버보단 볼트가 싸다는 어느 블로그의 정보를 믿고 볼트 어플을 깔고, 관광객을 위한 카드인 리스보아카드도 24시간 짜리로 구입을 마쳤다. 여행 책자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리스보아카드와 관련된 블로그의 글을 급하게 읽으며, 어떤 걸 끊어야 이득일지 머릿 속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일정조차 뿌연 상태에선 답이 나올리 만무하고, 결국 반 포기 상태일지도 그래도 떠나기 전부터 너무 쉬운 호구가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늘 그랬듯 여행지에서는 우리 가족은 유쾌한 호구가 된다. 즐기러 간 여행에서 인상쓰지 말자고. 한푼 두푼 아끼려 하다가 정말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말자고. 조금 더 쓰더라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면 계획과 다른 여행이 되더라도 웃게 되는 순간이 자주 생기던 경험 덕분이다. 계획은 계획일 뿐, 세상일이 그러하든 여행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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