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계획일 뿐, 유쾌한 호구가 되기로 했다
포르투갈 비행기 티켓은 작년 5월에 끊었다. (1화 참고) 나만 믿으라고 했다. 미리미리 계획을 세우리라-유럽 여행 다녀온 지인들이 그러하였기에-다짐했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다.
숫자에 약하다보니 날짜와 시간 감각도 부족한 건 당연한 이치. 이번엔 특별히 평소 여행보다 얇으면서도 많이 쓸 수 있는 A5 공책 한 권을 준비했다. (평소엔 손바닥 만한 수첩을 하나 챙겨서 일정이나 감상을 조금씩 남긴다.결국 마지막엔 흐지부지 되는게 내 스타일이긴하다. )
그렇지만 이번 만큼은 매번 휴대폰 어플을 뒤지며 확인하는 번거로움도 줄이고 남편을 향한 무의식적인 방어를 위해서도 무기가 필요했다. 쉽게 말해 남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증거물 수집 정도가 되겠다.
비행기 표 예매 후 한참 시간이 지난 늦가을 한적한 주말 오후, 준비한 공책과 여행 책자를 챙겨 남편과 카페에 앉았다. 비행기 이착륙 정보와 예약한 숙소의 주소와 특징을 적으면서 계속 남편에게 여보, 이 날짜 맞나. 여보,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걸리네. 여보, 얼마에 표를 끊었지.를 물어대면서 여보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만큼은 여보여보여보, 오빠오빠오빠를 불러대는 나의 모습이 왜이리 한심한지. (숙소 예약 썰은 따로 풀만큼 사연이 길다.)
가끔 남편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째려보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난 무지 소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그 이후에도 두세 번 더 있었다. 그때마다 난 투지에 불타다가도 금세 불쌍한 눈빛이 되었는데, 이날은 어쨌든 좀 더 밝고, 명랑하고, 희망에 찬 눈빛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렇게 완성한 첫장을 넘기고 두 번째 장에는 리스본과 포르투로 이동할 때 필요한 기차 예약 정보와 환전한 돈에 대한 것들을 썼다. (포르투 기차 예약 관련해서 왠만한 블로그 글을 다 읽었는데 이 분 글이 제일 도움이 많이 되었으니, 혹시 정보를 얻고 싶다면 옆을 클릭하시길. https://blog.naver.com/jye9432/223654603961 )
새로 생긴 동네 맥도날드에 앉아서 포르투갈 일정을 짜려고 계획한 날. 노트 세 번째 장에는 교통편을 정리할 작정이었다. 너무 먹고 싶었던, 추억의 상하이 스파이시 버거를 시켜놓고는 남편과 둘이 앉아 기분 좋게 대화를 시작했는데, 대화의 끝엔 내가 굉장히 슬픈 눈을 하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좀 더 싸게, 그리고 좀 더 편하게 이동을 하려면 미리 표를 끊거나 일정에 적합한 교통 방법을 결정해야 하는데, 여행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간단한 일정조차 준비하지 못했고, 또 리스본에서 탈 수 있는 교통편이 생각보다 너무 다양하다는 것.(현지에 가보니 막상 책에 나온 설명보단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리스본 근교 도시 이동이라는 큰 산을 마주하니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내가 결정할 것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건지, 방법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아마 둘 다 이유가 되지 않을까.
여행가기 전 검색을 하다보면 넘치는 정보에 질식되는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 이후 포르투갈 교통과 관련된 글을 볼 때면 울렁증 비슷한 증세로 검색을 몇 번 포기했다. 타고난 계획형이 아닌 나에겐 요즘 같이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선 뭘 해도 손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남편에게 그냥 우버 부르면 어디든 간다. 돈 좀 더 쓰면 되지. 라는, 도움을 주겠다는 건지 부담을 주겠다는 건지 헷갈리는 말을 듣고 이 페이지는 나의 능력 밖의 영역임을 인정했다.결국 여행책보다 훨씬 부실한 정보만 옮겨 적고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여행 일주일 전, 이젠 꼼짝없이 준비해야 하는 상황. 나 이번 여행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때 그때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갈거야. 라는 선언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었는지. 포르투갈이 한적한 동네 마실도 아닌데 말이다. 뭘 알고는 있어야 어디든 갈 것 아닌가. 그래서 네 번째 장부터는 최소한의 여기는 놓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꼭 가봐야할 곳 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다.
우선은 리스본 내에 있는 곳
1. 제로니무스 수도원 - 꽃보다 할배에 나왔다는데, 여행 책자에 있는 사진을 보니 멋있어 보였고. 유네스코 문화 유산이니까!
2. 에그타르트 원조 가게, 파스텔 데 나타 - 여기를 가지 않고 돌아온다는 건 대전에 놀러가서는 성심당에 들리지 않는 것.
3. 벨렝 탑. 테주 강가 위치했는데 사진을 보니 뭔가 있어 보였다.
4. 상조르즈 성 -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 전망대에서 석양을 봐야하기에. 타일러도 세계테마기행에서 방문한 장소.
5.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다 볼 수 있는 전망대.
6.국립 판테온 - 포르투갈 위인을 모신 곳. 화요일과 토요일 벼룩시장이 열려서 날짜가 맞다면 방문해보고 싶었다.
7. 국립 고대 미술관 - 뒤러의 작품들이 있다고도 하는데,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그곳 미술관 혹은 박물관 하나는 가보자는 마음으로.
그 나라의 문화나 유명한 관광지, 먹을거리 같은 굵직굵직한 정보들은 여행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첫 일본 여행 이후 두 번째 여행인 2010년 떠난 상해와 2013년 아이와 처음 떠난 오키나와도 모두 책으로 준비했는데, 여행 후 너덜너덜해진 책을 보면 참 치열하게 돌아다녔구나 싶다. 그 당시엔 여행 블로그가 지금처럼 엄-청 많지 않았으니까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여행책자를 전과를 보듯 찬찬히 여러 번 읽다 보면 하나씩 떠오르는 곳이 있다. 거기에 쓰여진 관광 명소의 명칭과 사진, 지도에 집중하다보면 말이다. 그 중 몇 개를 내 마음에 품으면 된다. 이렇게 해도 결국 다 못간다.
요즘은 여행 블로거(유튜버)가 많아지면서 책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은 자신의 여행 일기 성격을 띄는데 나 같은 경우는 안 좋은 후기에 금세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시시콜콜한 그들의 감정까지 들어주다보면 지쳐버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여행책자에 기댄다. 마치 담백하고도 정갈하게 차려진 한정식을 놓고 내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천천히 먹을 수 있는 기분이랄까. 이에 비해 인터넷 검색은 북적북적한 푸트코트 같다. 많이 줄 줄을 서있는 곳은 어디인지, 누가 뭘 먹는지, 뭘 시키는지 기웃거리 듯 정보를 탐색해야하는 점이 나랑은 참 맞지 않다. 그래서 난 장소를 정한 이후 블로그의 글을 보며 작은 팁들을 참고하는 편이다.
이렇게 나의 여행 계획은 리스본에서 끝났다.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포르투를 미쳐 알아보기도 전에 떠날 날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행 전 날 우버보단 볼트가 싸다는 어느 블로그의 정보를 믿고 볼트 어플을 깔고, 관광객을 위한 카드인 리스보아카드도 24시간 짜리로 구입을 마쳤다. 여행 책자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리스보아카드와 관련된 블로그의 글을 급하게 읽으며, 어떤 걸 끊어야 이득일지 머릿 속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일정조차 뿌연 상태에선 답이 나올리 만무하고, 결국 반 포기 상태일지도 그래도 떠나기 전부터 너무 쉬운 호구가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늘 그랬듯 여행지에서는 우리 가족은 유쾌한 호구가 된다. 즐기러 간 여행에서 인상쓰지 말자고. 한푼 두푼 아끼려 하다가 정말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말자고. 조금 더 쓰더라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면 계획과 다른 여행이 되더라도 웃게 되는 순간이 자주 생기던 경험 덕분이다. 계획은 계획일 뿐, 세상일이 그러하든 여행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