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마침내 태양의 문이 열리다
ㅡ 리스본에 도착한 첫날 밤. 숙소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다시 잠들지 못할 거라면 일출이라도 보고 싶었다. 숙소 근처에 가까운 전망대 위치를 구글링 했다. 산타루치아 전망대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를 찾았는데, 두 전망대 모두 도보가 가능한 거리라 둘 중 어디를 가야 할지 침대 안에서 꽤 고민했다. 구글맵 후기를 읽다가, 숙소와 조금 더 가까운 거리인 산타루치아 전망대로 결정했다.
새벽 6시 40분, 최대한 옷을 따뜻하게 껴입고 셋 다 밖으로 나왔다. 구글지도 앱의 안내를 따라 알파마 지구라고 불리는 캄캄한 리스본 구시가지를 걸었다.
포르투갈에선 "칼사다 포르투게사"라는 돌바닥 문양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새벽에 비가 살짝 내린지라 바닥이 엄청 미끄러웠다. 더군다나 이 캄캄한 길에 간간히 세워진 노란 가로등이란. 겨우 실루엣만 드러낸 오랜 리스본 건물들이 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나 혼자서 이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오르막을 계속 올랐다. 아, 이게 바로 리스본 대성당이었구나. 성당 가운데 꽃모양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꽃잎 12장은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한다.) 그런데 왜 저 문양마저도 으스스한 건지.
다행히 산타루치아 전망대에 금세 도착했다. 해가 뜨기 한참 전. 전망대 입구에 보이는 따뜻한 차와 빵을 파는 푸드트럭이 보였다. 제대로 왔구나. 반가운 형광등 불빛이여. 우리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두서너 명 정도의 사람들도 거기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는 듯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른쪽으로 어스름한 새벽의 테주강과 콕콕 박힌 집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 10분이나 흘렀을까.
"여보, 여기 옆에 전망대가 하나 더 있는데 거기 가볼까?"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바로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였다. 아마도 책자에 나온 여러 전망대 소개글 중 그곳에 대한 설명이 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사진 속 주황색 지붕을 쫙 펼쳐놓은 풍경도 참 멋져 보였다. 하지만 일출과 일몰은 포르투에서 실컷 볼 생각에 리스본에서 따로 일출까지 계획하고 장소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전망대가 바로 옆에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도착한 오르막길의 끝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밴으로 보이는 차들과 여러 장비들을 피해 그들 곁을 지나쳤다. 우린 광장이 아닌 공터처럼 보이는 곳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벤치 뒤로는 고풍스러운 호텔 앞으로 트램이 서는 역이 있었다. 유럽 예술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랄까.
전혀 기대하지 못한 호텔뷰에 치이고 돌아 앉은 후 보이는 풍경은 테주강을 배경의 식당뷰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쉬움이 컸다.(벤치 바로 아래엔 멋스러운 이탈리안 식당이 꽤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점점 커지고 있을 때, 신랑은 벌써 아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황급히 따라간 그곳엔 배우처럼 보이는 멋진 여자가 테주강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여기였어! 이게 뭔 상황인지. 얼마나 멋진 일출이 나오길래 촬영까지 왔을까 싶으면서도, 모두에게 허락된 뷰포인트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곳은 전망대 바로 옆 쪽. 시야를 가리는 야자수가 얼마나 야속하던지. 습습후후 호흡하며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자. 만족하자. 속으로 주문을 외우는 동안 점점 날은 밝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잔잔한 테주강. 햇살에 점점 밝은 주황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지붕들. 이거면 충분하지. 날씨 요정님. 감사합니다. 마음을 먹은 그때 마법처럼 촬영팀들이 철수하는 것 아닌가.
처음엔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하던 스텝들과 대화를 시도한 남편은 해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는데, 그들은 자리를 떠나며 좋은 여행이 되라는 인사를 우리에게 해주었다.
결국 모두에게 해피앤딩.
태양의 문이라는 뜻의 포르타스 두 솔. 태양의 문이 활짝 열리자 우리 셋은 태양의 정수리부터 시작해 얼굴을 모두 드러낼 때까지 거기 서있었다. 난 상기된 아들과 남편의 얼굴도 보았다. 난 그들보다 더 웃고 있었겠지.
<비포 선라이즈>의 영화는 남자 주인공 제임스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셀린에게 무박 일일의 비엔나 여행을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대부분은 해가 뜬 다음 날 헤어지기까지 둘 사이의 끝없는 대화로 꽉 채워진다. 주고받는 대화를 듣다 보면 내가 젊은 날 가졌던 고민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중 어떤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둘은 공원에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셀린은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다 이런 말을 꺼낸다.
"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며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하곤 해. 여행을 한다거나 밤을 새운다거나 일출을 본다거나 하면서 말이야."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하는 것. 그건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다. 여행을 하고, 밤을 새우고, 일출을 보는 것. 셀린과 제임스처럼. 우리 셋은 해가 뜨기까지 리스본에서 그렇게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