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마스 Jan 11. 2017

우리의 새 보금자리

그렇게 내비게이션의 전원은 꺼졌버렸고,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내 뒤쪽으로 차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어서 갑자기 정차하기도 좀 애매한 상황이었다.


순간 몇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아주 빠르게 스쳐지나갔는데,


1. 나는 내가 지금 가야 할 곳의 주소를 알고 있다.(제일 중요)

2. 미국은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단 호텔 주소와 일치하는 도로명 표지판을 찾으면 된다. (다음으로 중요)

3. 어젯밤에 아저씨가 호텔을 찾기 위해 그 주변을 몇 번 뱅글뱅글 돌았던 덕분에, 그 근처까지만 가면 어제의 기억을 되돌려 호텔을 찾을 수 있다.

4. 아침에 나를 데리러 온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렌터카 오피스로 향하던 길을 되짚어보니, 차가 계속 직진을 하다가 딱 한번 우회전을 했다.

5. 4에서 말한 '직진-우회전'이 맞다면, 가상의 직사각형을 그리고 반대쪽의 두면을 따라서 우회전-직진-우회전-직진을 하면 원래의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위의 몇 가지 가설들을 바탕으로 가상의 선을 머리 속에 그린 뒤, 나는 그냥 나의 감을 믿고 한번 가보기로 했다 (안되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되니깐). 중간중간 제대로 가는 게 맞는지 좀 불안하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호텔 주소와 일치하는 큰 도로 이름이 '짠'하고 나타났다. 그 도로명 간판이 보이는 사거리에서 원래 계획대로 우회전을 했고, 그렇게 좀 더 가다 보니 어젯밤에 기사 아저씨가 헤매던 그 동네가 보였다. 어제 기사 아저씨가 호텔을 못 찾고 계속 헤맸던 것이 다음 날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무사히 주차하고 나서야, 네비가 꺼졌을 때의 그 깜짝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금 전까지 자동차 안에서 '사투'를 버린 나의 긴박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방 안은 아주 평화로웠다. 아내는 일어나서 조용히 짐 정리를 하고 있었고, 토쥬군은 여전히 세근 세근 자고 있었다. 토쥬군은 좀 더 재우기로 하고, 나는 아내가 정리한 짐들을 하나씩 하나씩 렌터카로 실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이 호텔에서 했던 거라곤 컵라면 하나 먹고 거실 소파에서 잔 게 전부였다. 무료로 제공되는 조식도 못 먹었고, 아침에도 자동차 렌트하러 간다고 제대로 호텔에서 쉬지도 못했다. (여기서 교훈: 도착하는 날에는 그냥 아무 호텔에서나 묵으세요.)


우리가 첫날 묵었던 홈우드 스위트


호텔에서 출발하기 전에, 아까 전원이 나갔던 내비게이션의 문제를 천천히 한번 점검해 봤다. 원인은 아답터와 뒤쪽 전원 연결 부분의 접속 불량이었다. 내비게이션을 똑바로 세우면 어떻게든 다시 선이 빠져서,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내비게이션 화면이 위를 보도록 눕혀놓고 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네비를 계기판 앞에 눕혀놓고 출발하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토쥬군을 안고 주차장으로 나온 아내는 내가 빌려온 트럭 크기의 렌터카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찌 됐든 네비도 무사히 다시 연결시켰고, 이제 앞으로 살게 될 집으로 이동만 하면 됐다. 우선은 하우징 오피스에 들러 입주 서류를 작성하고 집 열쇠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네비에 오피스 주소를 찍고 출발했다. 내비게이션 모니터에는 호텔에서 오피스까지 대략 10분 정도 걸리는 걸로 나왔는데, 반듯반듯하게 난 도로를 따라가면 별문제 없이 오피스에 도착할 수 있는 코스였다.


마침 날씨도 좋았고, 앞으로 살게 될 동네의 풍경을 힐끔힐끔 구경도 하며 운전을 했다. 이제 사거리 하나를 지나서 직진만 하면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네비가 알려줬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었던 그 순간.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사거리에서 네비에 나와있는 대로 직진을 하려고 보니, 커다랗게 "공사 중"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길이 떡하니 막혀있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하며 급하게 차선을 바꿔 좌회전을 했다. 유턴을 해서 원위치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가도 유턴하는 곳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유턴할 곳을 찾아 계속 달리다 보니 앞으로 내가 다니게 될 학교가 갑자기 나타났다. 본의 아니게 차를 타고 '학교 투어'를 하나 했더니, 학교에는 미리 등록된 주차증이 없으면 통과하지 못하게 게이트를 막아 놓아서 다시 또 유턴을 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돌고 돌아서 가까스로 하우징 오피스에 도착했다. 아까 공사 중이었던 사거리에서 1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무려 2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역시 방심은 금물이다. 


토요일 오후의 하우징 오피스는 한가로웠다. 아파트 입주 관련 서류들을 하나하나 작성하고 난 뒤, 리스 계약서 사본 및 주차증과 함께 앞으로 살게 될 아파트의 현관문 열쇠 두 개와 메일박스 열쇠 하나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줄곧 비밀번호 내지는 지문을 이용하는 도어록을 사용해오다가, 이렇게 커다란 열쇠 뭉치를 받으니 왜그리 어색하던지.


아무튼 그렇게 열쇠를 받고, 차를 몰아 드디어 앞으로 살게 될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 앞에 선 우리 세 식구.


첫 만남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마치 결혼식 당일까지 신랑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새신부처럼, 이제 곧 마주하게 될 이 문 너머의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무척이나 궁금해하며 우리는 조심스레 열쇠를 넣고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이 우리를 맞이한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우리는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집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다만, 미국은 실내에서도 보통 신발을 신기 때문에 그동안 바닥에 쌓여있었을 먼지를 생각하니 무엇보다도 침실의 카펫과 거실 바닥의 청소가 시급함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아직 토쥬군이 걷지 못할 때라, 먼지 가득한 바닥에서 기어 다닐 토쥬군을 상상하니 난감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한국에서 들고 온 캐리어 가방 3개가 전부였다. 청소 도구는 물론이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도 없고, 누워서 잘 수 있는 침대는 고사하고 바닥에 깔 신문지 한 장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은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에 세 식구가 그저 덩그러니 '내던져진' 상태였다.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미리 주문해 놓은 IKEA 가구를 배달하는 아저씨의 전화였다. 이케아 배송 아저씨는 곧 도착할 예정이라며, 최종적으로 우리 집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몇 분 후, 커다란 딜리버리 트럭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거실 창밖으로 보였다. 이어서 아저씨 두 분이 트럭에서 내린 뒤, 무언가를 짐칸에서 계속 꺼내신다.


우리가 그때 주문했던 아이템들은 침대 매트리스 2개, 식탁 및 의자, 소파, 책상, 토쥬군 놀이용 매트 등이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딱 적당한 시점에 이 모든 가구들을 무사히 배달해준 이케아 아저씨들께 어찌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저씨들께 적지 않은 팁을 드렸는데, 문득 한국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택배 배달로 고생하시는 분들께 (꼭 금전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게 이케아 아저씨들이 가고 난 뒤,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또 텅 빈 이 공간에 남겨지게 된다. 10분 전과 달라진 것이라곤 가지고 있는 짐이 캐리어 3개에서 조립해야 하는 이케아 상자 및 비닐 포장으로 늘었다는 것.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막막해서 그저 헛웃음만 계속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아내나 나나 아직 한 끼도 못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짐 정리나 청소는 뒤로 미뤄두고,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처자식을 굶길 수 없다'는 사명감을 안은채, 나는 혼자서 지갑을 들고 일단 밖으로 나가보았다. 다행히도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집 바로 앞에 반가운 서브웨이(subway) 샌드위치의 간판이 보였다. 서브웨이에 들어가서 나는 기다란 (footlong) 터키 샌드위치를 하나시키고, 피로회복제 대용으로 다이어트 코카콜라도 하나 주문했다. 그리고 집에 마실 물이 없어서 계산을 하며 "혹시 물은 없어?"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점원 친구가 "왜 없어?"라며 커다란 플라스틱 컵을 하나 꺼내고는 바로 수돗물을 가득 받아 "마시렴"하며 친절하게 건네준다. (당황한 토마스 씨의 표정은 알아서 상상해 주세요)


성의를 생각해서 일단 받긴 했는데, 컵 사이즈가 큰 데다 가득 담아주기까지 해서,  마시면서도 어디까지 마셔야 저 친구가 기분이 안 나쁠까, 고민하게 되었다. 눈치껏 어느 정도 마시고 나서, "저기 말이야, 이 물 말고, 플라스틱병에 든 물은 없어?"라고 다시 물어보니, 그제야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어쩌지? 우린 페트병에 든 물(bottled water)은 안 파는데... 저기 건너편 주유소에 가면 팔 거야"라고 대답한다.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그 친구가 가르쳐준 주유소에서 기름 대신 물 두 병을 샀다. 그리고 한 손에는 샌드위치 봉투, 다른 한 손에는 물과 콜라를 들고 당당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굳이 배경음악을 깔아야 한다면,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틀어주세요)


오늘의 첫끼이자 일용할 양식인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맛보기 위해 우리는 이케아 상자 하나를 뜯어서 거실 바닥에 경건하게 깔았다. 그리고 세 식구가 다 같이 그 종이 상자 위에 앉아 서브웨이의 샌드위치를 나눠먹었다. 아. 샌드위치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구나. 그리고 시원한 다이어트 콜라 덕분에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많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무사히 도착했고 식사도 마쳤으니, 이제 우리는 방금 전 배달되어 온 이케아의 매트리스 두 개를 침실에 깔고 낮잠을 청하기로 했다.


매트리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방에 나란히 누운 우리 세 식구.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워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든 토쥬군의 조그마한 손을 살며시 잡은 채, 나는 매트리스 위에서 두발을 쭉 뻗고 누워 창밖의 풍경을 올려다봤다. 창밖으로는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햇살과 파란 하늘, 그리고 뭉게구름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토마스, 어서 와! 멀리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지? 거기가 이제부터 너희 집이란다. 거기서 세 식구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렴


창밖의 햇살과 하늘, 구름들이 마치 내게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 순간 나도 모르게 뭉클해진다.



침실에 누워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과 구름들


'부디 이곳에서 우리 세 식구,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도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의 첫 낮잠 속으로 스르르 빠져 든다.

작가의 이전글 첫날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