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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an 11. 2017

첫날 밤

우리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였는데, 근처까지 와서 호텔을 찾지 못해 기사 아저씨가 몇 번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도착하고 보니, 호텔이 좀 애매하게 구석에 숨어있어서 초행길에는 충분히 헷갈릴만했다.


무사히 이곳까지 데려다준 기사 아저씨께 넉넉하게 팁을 드리고, 호텔 체크인을 했다. 이 호텔은 여러 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체크인을 하는 메인 빌딩에서 우리 방이 있는 건물까지 짐을 들고 이동하는 것만 해도 여간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인상 좋고 덩치도 좋으신 직원 아주머니께서 우리 짐을 다 옮겨주셨고, 토쥬군을 위해 커다란 크립도 가져와서 직접 설치해주셨다. 땀을 뻘뻘 흐리시면서 친절하게 도와주시는 그분의 정성에 감동해서 토마스 씨는 또 적지 않은 팁을 드렸다. (미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팁을 얼마나 줘야 하느냐가 항상 고민되는데, 미국의 팁 문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자.)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든 토쥬군은 호텔에 도착해서도 계속 자고 있었고, 혹시라도 중간에 깰까 봐 조심조심 토쥬군이 누워있는 카시트를 통째로 들어서 방으로 옮겼다. (로비에서 방까지 거리가 멀다 보니, 카시트 옮기느라 팔이 빠지는 줄 알았음) 방에 들어와서 토쥬군을 침대 위에 눕힐까 하다가 혹시라도 자다가 떨어질면 어떡하나 싶어 토쥬군이 누워있는 카시트는 침대 옆 바닥에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내와 나는 처음으로 두 발을 뻗고 소파에 앉아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미국에 도착해 국내선 비행기를 탄 이후로 한 끼도 못 먹은 상황이었다. (국내선에서 기내식을 주긴 했지만, 토쥬군을 돌보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아내나 나나 둘 다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당시 우리 룸에는 조리시설 및 기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토쥬군이 한창 이유식을 먹을 때라, 미리 한국에서 냉동으로 꽁꽁 얼려온 이유식을 데우기 위해서는 조리시설이 반드시 필요해서 일부러 이곳으로 예약을 한 것이었다. 굶주린 우리에겐 조리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온 두 개의 컵라면, 신라면과 튀김우동이었다. 전기주전자로 끓인 물을 라면 용기에 붓고,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고생했다, 수고했다'며 격려를 했고, 꼬박 하루가 걸려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해 이렇게 뜨끈한 컵라면 한 사발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라면 먹는 시간. 가히 한 젓가락, 한 젓가락이 감동이었다. 그리고 하루 동안의 피로를 씻어주는 한 입의 국물! 아내와 나는 태어나서 처음 라면을 먹는 사람들처럼, 정성스레 라면을 한입 한입 흡입했고, 다 먹고 나니 비로소 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공깃밥과 김치가 하나쯤 있었으면 했지만, 당시 우리에게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었다.)


맛있게 라면을 먹은 뒤, 깨끗이 씻고, 이제 두 다리 뻗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기만 하면 오늘의 일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상황. 아내에게 '고생했어. 잘 자. 굿나잇!'이라고 말하며 침실의 불을 끄려고 하는 그 순간!


카시트에 누워있던 토쥬군이 꿈틀꿈틀하면서, '으아아아아아아앙~~~' 울음을 터뜨린다. 아내가 쏜살같이 토쥬군에게 달려간다. 






다음날 아침, 핸드폰 벨소리에 잠이 깼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거실 소파에 이불도 안 덮고 누워있었다. 아마도, 간밤에 꽤 오랫동안 잠투정을 한 토쥬군을 피해 거실로 나왔다가 소파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침실에 살짝 들어가 보니 아내와 토쥬군이 평화롭게 자고 있는데, 내가 잠든 이후에도 토쥬군을 돌본다고 계속 고생했을 토쥬맘을 생각하니 왠지 맘이 짠했다.


난장판이 된 거실로 다시 돌아와,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 방금 전에 뜬 번호로 전화를 했다.


나: 저기, 혹시 방금 전화하셨어요?
상대방: 아. 네. 제가 전화했어요. 여기 렌터카 회사인데요. 렌터카 예약하셨죠? 지금 데리러 가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되죠?
나: (호텔 주소가 적힌 종이를 허겁지겁 찾아서 설명한다.)
상대방: 네, 그럼 제가 15분 뒤쯤 그쪽으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시간을 보니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간. 조금만 더 자고 싶었지만, 15분 뒤에 온다니깐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늦은 시간으로 예약하는 건데...) 아내와 아이가 깨지않게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보니, 호텔의 메인 빌딩 앞에 커다란 검은색 SUV가 한대 떡하니 서있다. '역시 미국은 차도 크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가보니, 운전석에 앉아 있는 친구가 웃으면서 "렌터카 예약했지?"라고 물어본다. "응. 맞아"라고 대답하며 운전석 옆에 타는 토마스 씨.


렌터카 오피스로 가는 동안, 이 친구가 끊임없이 말을 건다. 어디서 왔냐, 무슨 일로 왔냐, 아직 잠이 제대로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친구랑 계속 영어로 이야기를 하려니 좀 힘들었지만, 굉장히 유쾌한 친구 덕분에 기분 좋게 렌터카 오피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Enterprise 렌터카는 고객이 있는 곳까지 데리러 오는 게 특징이다.


오피스에 도착해서도 직원들이 다 친절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이 동네는 이렇게 다들 웃으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도 밝게 인사하는 굉장히 외향적인 분위기였다. 서류를 작성하며 내비게이션도 하나 빌렸다. 이제 차만 받으면 되는데, 아까 나를 여기까지 태워준 친구가 다가온다. 


내가 방금 네가 타고 갈 차를 깨끗하게 세차해놨거든. 밖에 있는 저거 타고 가면 돼


라고 말하며 열쇠를 건네준다. 밖으로 나가보니 아까 내가 타고 온 그 커다란 검은색 SUV가 떡하니 서있다. (차가 쿨하게 "What's up, man"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됩니다)


원래 내가 예약했던 차는 컴팩트 SUV인 토요타 RAV4였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받은 차는 미드사이즈 SUV인 닛산 Xterra였다


내가 받은 차는 닛산의 Xterra라는 모델이었다. 실제로 보면 소형 트럭 느낌이 날 정도로 큰데, 미국에서는 이 정도 크기를 '미드 사이즈'라 부른다. 한국에서 내내 작은 차를 몰아 오다가, 갑자기 이렇게 큰 SUV를 운전하려니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 했다.


아무튼, 차를 받았으니 이제 시동을 걸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면 하면 됐다. 그런데 렌터카 오피스를 빠져나와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대로 우회전을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액셀을 밟으려고 하는 그 순간.


갑자기 내비게이션에서 "삑"하는 소리가 나더니, 모니터에 "배터리가 부족해서 10초 후에 내비게이션 전원이 꺼집니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나 : (독백으로) 안돼! 하지 마...! 나 호텔 다시 가야 된단 말이야. 호텔에 아내와 아이가 기... 다리고 있...는데...


나의 이런 애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확히 10초 후에 전원이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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