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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an 10. 2017

미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국행 비행기가 인천공항의 활주로를 이륙했다. 비행기 동체가 땅과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앞으로 한동안은 만나지 못할 부모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부디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앉아 있는 토마스 쥬니어(이하, 토쥬)가 칭얼대기 시작한다. 출국 한 달 전에 돌잔치를 했던 만 1세의 토쥬군은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기저기를 관찰하고 만져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내 지겨워졌는지 토쥬군의 잠투정이 시작된다. 아내와 내가 원래 기대했던 시나리오는 토쥬군이 비행 내내 깨지 않고 쭉 꿀잠을 자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환경인 데다가 소음도 시끄럽고 높은 고도 때문에 기압이 떨어져 귀도 아팠는지 토쥬군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특히 중간에 기내식이 나오면서 기내의 조명이 켜지자 토쥬군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내와 내가 번갈아가며 한 명이 토쥬군을 보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빨리 밥을 '해치우기로' 했다. 한참을 그렇게 토쥬군을 달래다 보니 드디어 기내 조명이 꺼진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토쥬군은 다시 잠들었고, 우리에게도 평화의 시간이 구세주처럼 찾아왔다.


조명이 꺼진 조용한 비행기 안에서 잠을 청해 보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는다.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 1년 동안 있었던 우리에게 있었던 많은 일들 - 예컨대 아이의 출생,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며 반복되었던 육아, 유학 준비, 합격 발표, 비자 발급, 이사 준비 등 - 이 하나씩 머릿속을 때리며 지나간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뒤척이며 쉽게 잠들지 못하는 동안, 내가 탄 비행기는 태평양의 날짜변경선을 부지런히 지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지게 될 이야기의 배경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가 탄 비행기는 미국 경유지 공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채 비행기의 출입문을 나오는데, 게이트로 이어지는 통로 입구에 항공사의 현지 직원으로 보이는 분께서 아내와 내 이름이 크게 적힌 종이를 양손에 들고 있다. 비몽사몽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다가 우리 이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는데, 옆에 있던 아내도 놀라긴 마찬가지.


나: (그분께 다가가서 조심스레) 무슨 일로 저희 이름을 들고 계신지..?
직원분: (교포 발음으로...) 환승하시는 다음 비행기까지 시간이 빠듯해서 혹시 비행기 놓치시지 않게 저희가 도와 드리려고요. 저쪽으로 가시면 입국심사장이 나오는데요. 거기서 12번 창구로 바로 가세요. 그럼 입국 심사 금방 끝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이 가르쳐준 대로, 우리는 입국심사장의 12번 창구로 향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다른 창구에 비해 12번 창구에만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거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내가 환승한 공항은 심할 때는 입국 심사하는데만 두 시간 넘게 걸리는 무시무시한 곳이었음.) 예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늘 혼자여서 입국심사도 간단하게 끝났는데, 이번에는 세 식구가 한꺼번에 입국심사를 받아야 해서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다. 입국심사관은 우리가 제출한 F-1(유학생) 비자와 I-20(입학허가서)를 꼼꼼하게 검토한다.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국심사를 받는 시간은 왠지 모르게 항상 긴장된다. 심사관은 우리의 여권 세 개에 도장을 하나씩 쾅쾅 찍어준 뒤,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입국심사와 세관검사를 끝내고, 인천에서 보낸 짐을 유나이티드 항공의 수하물 드롭하는 곳에 맡긴 뒤 다시 국내선 탑승 게이트로 이동했다. 나는 출장 때문에 몇 년 새 미국을 몇 차례 방문했었지만, 거의 20년 만에 미국에 온 아내는 감회가 새로울 법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 식구 전부 그런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멍한 상태로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했다. (미국 시간으로는 낮이었지만, 한국은 새벽 동이 틀 무렵이니...)


우리가 탑승할 국내선 비행기의 게이트 앞에서부터 토쥬군의 잠투정이 다시 발동을 걸기 시작했는데, 평소와 달리 미국까지 오는 동안 계속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토쥬군도 이미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유나이티드의 국내선 항공편에 탑승한 이후 토쥬군의 잠투정이 극에 달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아내와 나에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길었던 두 시간이 되었다. 미리 준비해 간 간식, 장난감, 책 등은 아무 소용이 없고 두 시간 내내 계속 울고 투정을 부리는데, 우리의 최종 목적지 공항에 도착할 즈음에는 아내와 나, 둘 다 녹다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일단 무사히 목적지 공항에 도착했다는 것에 안도했고, 한국에서 보낸 짐들도 다행히 빠진 것 없이 다 찾았다. 그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6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국의 처갓집에서 출발한 이후 거의 22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최종 목적지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선 비행기에서 한숨도 안 자고 버티던 토쥬군도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긴장이 풀렸는지 어느새 엄마품에 안겨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일단은 토쥬군을 좀 재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공항 한 편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의 어느 낯선 공항의 의자에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아이는 아내의 품에 안겨 잠들었고,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기댄 채 멍한 눈으로 금요일 저녁 어딘가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낯선 생김새의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우리 옆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커다란 캐리어 3개와, 유모차 1개, 카시트 1개가 마치 높은 탑처럼 카트에 쌓여 있었고, 이따금 나오는 안내 방송 메시지와 전광판, 광고 표지판에 선명하게 찍힌 알파벳들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미국'임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지 시키고 있었다.


24시간으로 측정되는 물리적인 하루 동안 우리 세 식구에게 벌어진 공간적 변화는 놀라울 만큼 컸으며, 그 변화 한가운데 던져진 당시의 우리에겐 앞으로 이곳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보다는 사실 초조함과 두려움의 감정들이 더 컸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의자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 보니, 해가 지는지 공항의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항에서 앞으로 살게 될 도시로 다시 이동해 미리 예약해둔 호텔에서 1박을 한 뒤, 앞으로 살게 될 아파트에는 다음 날 들어갈 예정이었다. 더 늦기 전에 호텔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내는 토쥬군을 조심스레 안은 채로, 나는 캐리어가 층층이 쌓여있는 카트를 천천히 밀면서 밖으로 나와 커다란 밴택시를 한대 잡았다.


우리 짐은 차곡차곡 밴 뒤쪽에 가득 실렸고, 그 바로 앞의 좌석에는 미리 준비해온 카시트를 설치해서 토쥬군을 눕혔다. 그리고 아내가 토쥬군 옆에 앉았고, 나는 제일 앞좌석의 기사 아저씨 옆에 앉았다. 이윽고 우리가 탄 밴은 공항을 빠져나와 앞으로 살게 될 도시로 출발했다.


기사 아저씨: (웃으면서) 너 혹시 캐리어에 벽돌 넣었니? 왜 이렇게 무거워?
토마스 씨: 우리는 막 한국에서 도착했는데, 내가 앞으로 여기서 공부를 해야 해서 책을 많이 챙겨 왔거든. 아마 책 때문에 짐이 좀 무거웠을 거야
기사 아저씨: 와. 한국에서 왔구나. 혹시 월드컵 봤어? 한국팀도 굉장히 잘하더라. 


기사 아저씨는 운전하면서 얼마 전에 끝난 월드컵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 하지만 그때는 오랜 비행으로 이미 온몸의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이기도 했고, 히스패닉인 그 아저씨의 멕시코식 발음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와서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내 말로는, 아저씨 말에 동문서답하는 나를 보며 '우리 남편, 많이 피곤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공항에서 앞으로 살게 될 도시로 이동하는 중에 바라본 석양


우리가 탄 밴의 앞유리창 밖으로는 어느덧 멀리 해가 넘어가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과 이어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저 미지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거기서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또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약간의 두려움을 안은 채로, 나의 미국 유학 일기의 첫 번째 장이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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