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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an 12. 2017

첫 외출

짧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과 벽, 그리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그제야 나는 여기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퍼뜩 깨닫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옆에는 토쥬군과 아내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살금살금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이케아의 가구 박스와 캐리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먼지가 한가득이다. 무엇보다도 청소가 시급했다. 아직 걷지 못하는 토쥬군이 마음 놓고 기어 다닐 수 있게 한시라도 빨리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 청소 도구를 사러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청소 도구는 어디서 살 수 있지? 지금까지 미국에 몇 번 출장이나 여행 때문에 온 적이 있었지만, 청소 도구를 살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당연히 어디서 청소 도구를 파는지도 몰랐다. 우리나라의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곳들이 분명 미국에도 있을 텐데, 그 순간에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해 낸 곳이 바로 코스트코(Costco)와 월마트(Walmart)였다. 스마트폰의 구글맵으로 검색을 해보니 마침 차로 15분 거리에 코스트코가 있었다. (참고로, 미국 사람들은 Costco를 '코스코' 내지는 '카스코'라고 발음한다. 여기서는 그냥 한국식 발음을 기준으로 '코스트코'라고 부르도록 하겠음) 우리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사용해오던 코스트코 회원카드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 카드로 미국에 있는 코스트코에서도 쇼핑이 가능했다. 다만, 구글맵으로 검색한 바에 따르면 한국과는 달리 토요일에는 오후 5시 30분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아내와 토쥬군을 깨워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렌터카의 시동을 켜고, 내비게이션에 코스트코의 주소를 찍었다. 뒷좌석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카시트를 설치해서 토쥬군을 앉혔고, 그 옆에 아내가 앉았다. 불과 어제까지는 한국에 있었던 우리 세 식구가 하루 만에 이렇게 트럭만큼 큰 SUV에 앉아, 토요일 오후에 낯선 미국의 고속도로를 달려 코스트코에 청소 도구를 사러 가는 상황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15분여를 달려 우리는 무사히 코스트코에 도착했는데, 그 순간 대략 세 가지의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1. 미국 코스트코에는 실내 및 지하 주차장 따위는 없다. 코스트코 건물 앞에 그저 광활한 야외 주차장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당연히, 주차장에서 빈자리를 찾기 위해 대기할 필요가 없다. 아내와 나는 주말 오후 코스트코 양재점의 그 전쟁터 같은 주차장 풍경과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2.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제 한번 가볼까'하며 차문을 열고 내리는데 뭔가 싸했다. 그랬다. 제일 중요한 코스트코 회원증을 집에 두고 온 것이다. 코스트코 입구를 바로 코 앞에 두고, 우리는 돌아서야 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 김광진 '편지' 중


3. 회원증을 놓고 온 사실을 깨달은 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한순간에 이렇게 바뀌는 것을 보고 갑자기 또 어리둥절. (뭐지? 무서워.)


미국 코스트코의 주차장 풍경


코스트코 주차장에 세워 놓은 우리 차의 지붕 위로 폭우가 쏟아졌다. 앞유리의 와이퍼는 쉴 새 없이 움직였고, FM 라디오에서는 우리의 마음은 몰라주고 이름 모를 경쾌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세 식구가 그렇게 차 안에 앉아 있노라니 나름 오붓한 분위기가 나긴 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한국에 있었던 우리에게 지금의 상황이 계속 꿈처럼 느껴진다. 잠시 후 비가 그치기 시작한다. 운전대에 머리를 파묻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뇌에 빠져있는 나를 보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말을 건넸다.


아내: 오빠, 오면서 보니깐 시어스(Sears)가 있던데 거기 한번 가보면 어때?
나: 시어스가 뭐야?
아내: 나 예전에 미국에 살았을 때, 아빠랑 시어스에 가전제품 사러 간 적이 있거든. 거기 가보면 청소기도 있을 것 같아.


마치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갑자기 햇살이 한줄기 비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1년 동안 가족과 함께 미국에 살았었던 아내의 경험이 반짝하고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시킨 대로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본 시어스라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는 실제로 가전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찾던 청소기도 있었다.



참고로 미국 집들에는 기본적으로 카펫이 깔려있고, 거실이나 주방 정도만 우리나라처럼 딱딱한 하드 플로어(Hard floor)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줄곧 딱딱한 바닥에서만 살아오다가, 갑자기 미국에 와서 카펫에서 생활하려니 처음에는 잘 적응이 안됐다. 카펫이 얼핏 보면 바닥이 푹신해서 편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이게 정말 먼지들의 천국이다. 제대로 카펫 청소를 안 해주면 온 가족이 먼지와 함께 숨 쉬며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청소기들은 카펫 청소에 특화된 것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다이슨(Dyson)이다. 다이슨 청소기는 카펫 먼지 하나만큼은 정말 끝장나게 잘 흡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우리는 애초부터 다이슨 청소기를 구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우연히 들리게 된 시어스 매장에서 다이슨 청소기 한 대가 (마치 지금까지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 중이었다. 그것도 카펫과 하드 플로어를 둘 다 청소할 수 있는 모델로 말이다.


아내: 아니, 어떻게 이 모델을 이 가격에 팔 수가 있죠?
점원 아저씨: (웃으면서) 가격 보고 깜짝 놀랐지? (Are you stunned by the price?) 이거 전시용 모델인데, 신모델이 나와서 이 가격에 파는 거야.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코스트코 회원카드를 집에 두고 온 덕분에, 우리는 시어스에서 원래 구입하려던 다이슨 청소기를 (블랙프라이데이에도 절대 살 수 없는) 엄청나게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계산을 하는 내내 점원 아저씨가 우리에게 "너네 정말 저렴하게 잘 구입한 거야"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청소기를 차 트렁크에 실으면서, 왠지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다양한 '삽질'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득템'했던 다이슨 청소기(좌)와 청소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토쥬군을 위해 준비한 장난감 청소기(우)

 


청소기를 구입한 뒤, 아내가 친절하게 다음 목적지를 가르쳐줬다.


아내: 오빠, 아까 보니까 저기 타겟(Target)도 있던데, 거기 가면 나머지 청소 도구들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나는 타겟이라는 곳도 이날 처음 들어봤는데, 알고 보니 다양한 생필품, 의류, 식품 등을 구입할 수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할인마트 체인이었다. 우리가 간 곳은 타겟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지점을 일컫는 슈퍼 타겟(Super Target)이었다.


 타겟은 우리나라의 홈플러스처럼 빨간색을 상징색으로 쓰고 있다


타겟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나는 그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넓은 공간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미국에 오기 전 우리가 항상 장을 봤었던 집 앞 킴스클럽은 토요일 오후에는 많은 사람들로 엄청 북적였었다. 그런데 똑같은 토요일 오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마치 우리 세 식구만 쇼핑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인구 밀도'가 굉장히 낮았다.


마치 도미노처럼 일례로, 식료품 코너에는 냉장고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도열해 있었는데, 그 넓은 공간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냉장고 앞을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걸음을 쫓아 마치 도미노처럼 냉장고에 불이 들어왔는데, 그게 정말 장관이었다. 조명이 켜진 냉장고 유리 안을 꽉꽉 채운 온갖 종류의 식품들을 보면서 나는 미국에 온 지 만 하루 만에 이 나라의 거대한 스케일을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날 타겟에서 미국의 넓은 땅덩이와 그곳에 흘러넘치는 풍족한 자원과 재화들, 그리고 낮은 인구 밀도를 간접적으로나마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냉장코너의 유일한 고객이었던 우리 세식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냉장고 불빛이 도미노처럼 우리를 쫓아왔다


아무튼, 우리는 이날 타겟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생필품 등을 구입했다. 예를 들면, 진공청소기와 함께 바닥 청소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물걸레 청소기를 고를 때는 다양한 선택 옵션들 덕분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고 (저는 새로운 청소 도구를 써보는 걸 좋아합니다), 매트리스 커버와 이불, 베개 등도 구입했다. 그리고 당장 집에 가도 토쥬군 이유식 외에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물, 주스, 빵 등의 비상 식품들도 구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의 미션들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뿌듯한 마음을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행복한 고민 끝에, 바닥 청소의 핵심인 물걸레 청소기는 이 녀석으로 결정했다. (페브리즈향이 핵심!)


불과 24시간 전에 미국에 도착해서 아직 시차 적응도 안된 나에게,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 - 호텔 소파에서 쪽잠을 자다가 일어나 렌터카를 빌리러 가고, 다시 짐을 차에 실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하우징 오피스에 들러 열쇠를 받고, 앞으로 살게 될 아파트에서 이케아 가구를 수령하고, 갓 배송 온 매트리스 위에서 낮잠을 자고, 시어스와 타겟에서 청소 도구들을 산 일들 - 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처럼 느껴졌다. 왠지 지금 당장 눈을 뜨면, 다시 서울의 그 익숙한 침실의 침대에서 일어나 '아, 역시 꿈이었구나'라고 말하며 기지개를 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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